바람이 머무는 저녁
어둠은 제법 오래전부터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모니터가 발
하는 연한 빛으로 겨우 30평방Cm 정도만, 그래서 키보드 쪽
만 푸르스름하게 겨우 문자를 식별할 수 있었다. 나는 오늘
내게 생긴 일들을, 어린 시절 몰두하여 개미집을 들여다 보
듯이 책상에 접착제로 붙여 놓은 것처럼 앉아서 1mm씩 정밀
측정 하고 있었다. 아침에 면도를 하다가 턱 근처를 조금 깍
아 낸 것은 아침이 다 되어서야 꾼 꿈 때문이었다. 피는 금
새 둥글게 번져 나왔고, 수건으로 3번이나 닦아 내었지만 다
시 4번째 방울을 만들고 있었다. 아직도 피는 붉었다. 동경
의 황궁 해자곁에서 당신과 함께 내려다 보았던, 세월이 풀
어져 녹은 듯한 진한 감색의 물처럼 조금 걸쭉해진 것 같기
도 했지만, 그 정도의 양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일부러 조금 짜내 보았지만 오히려 지혈이 되었는지, 5번째
방울은 조금씩 굳어 딱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잠시 거울속
에서 흰 비누거품을 잔뜩 바른채, 반쯤 수염을 깎다만 함부
로 솟은 머리카락의 익숙한 사내를 바라보던 나는, 던지듯이
면도기를 놓고 다시 꿈을 들여다 보았다.
당신은 어쩐일인지, 나 공부를 끝냈어요. 이제 돌아 왔어요.
라고 갑작스런 전화를 하였다. 나는 거의 현실같은 느낌으로
꿈속에서 담담하였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놀란 것은 아니
었다. 나는 박제된 얼굴로, 그런건 이제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야 라고 말하고 있었고 그것은 입술이 제멋대로 지껄이는 것
이었다. 나는 머리가 어질하다고 느꼈고, 나는 당신이 얼마
나 그리웠는지 몰라. 얼마나 많은 밤을 한숨과 눈물로 깨어
있었지는 베게가 증언해 줄거야. 라는 낮고 조용한 주장은
결국 입안에서만 맴돌았고, 당신이 떠났을 때 우린 이미 남
이 되었어. 얼마나 찬란한 시간들이었는지는 나도 알아, 나
는 당신의 곁에서 계절이 지나는 것도 알지 못하였고, 세상
이 바뀌는 것도 알지 못하였어. 정말 행복했어. 다른 행복
을, 더 나은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아마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해. 나는 다시는 당신과의 시간으로 인
생을 암흑으로 몰아 넣고 싶지는 않아. 석고상이 되어버린
나의 머리는 검은 3차원의 공간에서 빙글 빙글 돌고 있었고,
도저히 내것 같지 않은 입만 혼자서 그렇게 카랑카랑한 소리
를 내고 있었다.
당신의 눈에서는 금새 눈물이 고였다. 물론 전화로 대화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당신의 눈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당신의 수
만가지 표정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당신이 비 갠 뒤 교정의
태양으로 걸어 들어가며, 부채같은 눈썹을 지닌 눈을 가느스
름하게 뜨고 나를 바라보던 그 미소도, 뇌를 후벼내던 뜨거
운 키스의 정지된 시간, 눈자위의 근육이 풀려서 몽롱한 표
정이 되던것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일주일씩이나 떨어
져 있다가, 공항의 출구 문을 나설 때 당신의 머리카락은 바
람을 일으키며, 길게 뒤로 뻗어 날리고, 연하늘색 물바랜 청
바지의 보기좋게 날렵한 다리선은 바쁘게 움직이며, 목마른
여행자의 입술로 두리번 거리던 당신의 커다랗게 열려진 눈
동자도 그 표정도, 마침내 나를 발견하고 짧은 미소, 긴 웃
음을 만들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던 그 모습도 모두, 아니
단 한순간도 빼 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물론 당신의 좋은
내음이나는 가느다란 몸을 끌어안고, 당신은 두 발을 공중에
띄우고 그렇게 깊은 포옹으로 한바퀴를 돌 때 공항의 풍경이
빙빙 돌아가던 것을, 그리고 그 포근하고 부드럽고 딱 알맞
은 정도의 어깨를 잊는다면 그때 이미 나는 이 세상의 사람
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담담히 상관없다고 말하자 당신은 울고 나는 전화기
속의 당신을 뚜렷히 보고 있었고, 어느새 나는 볼을 적시며
어깨를 떠는 나를 보았다. 나는 상관안해! 라는 말을 독백으
로 여러번 읊조리고 있었고, 그말 만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
는 고독을 감추려 발버둥 치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넋이
없었고 얼빠졌고, 포기하였다. 당신은 잊기엔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무심하기엔 너무나 친절한 사람이었다. 나는 당
신이 붙여주던 코팩의 신기함으로 아직 둘이 침대에 엎드려
서로의 팩을 뜯어주며 낄낄 거리던 웃음 그대로이고, 한밤중
깨어 왼쪽어깨에 얌전히 놓인 당신의 머리가 가늠되는 무게
로 다시 끊어진 선잠을 이을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새벽에
깨어 다시 잠들지 못하는 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었고 그
불면의 밤들은 지나치게 오래도록 계속 되었다.
그러니까 이젠 충분해. 당신이 돌아온것과 내가 이 전화를
받아야 하는 것에는 전혀 연관이 없어. 당신의 인생에서 대
학 2년은 나와 함께 애태웠고, 나머지 1년은 따로 떨어져 15
배쯤 더 애를 태웠지. 그것으로 충분해. 당신의 인생은 내것
이 아니고, 당신의 다음 일정은 나의 것과 조금도 일치 되지
않아. 나는 당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
러니 진짜 전화한 용건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봐. 나는 모르겠
군. 당신과 연관된 모든 것은 이제 내게 하나도 없기도 하
고, 모조리 다 그대로 이기도 하니까, 만남과 헤어짐이 내
의지대로 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선택은 당신의 것이고 그
것도 나완 별루 연관이 없다고 생각해. 그렇게 단숨에 말하
고는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나는 점점
더 격정을 참을 수 없게 되었고 당신에게 뭔가 따져야 할 것
도 같았는데, 그런 것들은 모두 아무 상관 없는 일이란 것을
결국 나는 잊지는 못하였다.
그리곤 갑자기 잠이 깨었다. 역시 새벽이었다. 창은 또 다른
커다란 모니터처럼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고, 새들이 바
쁘게 지저귀고 있었다. 도대체 늦게 일어나는 새는 있는건
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였고, 곧이어 숲의 노래가 들려왔
다. 나는 반복되는 상관없는 상황을 어쩔 것인가 생각하였
고, 잠시 침대와 90도를 이루고 앉아 있었다. 도대체 내 꿈
과 당신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당신은 이미 나를 까맣게 잊
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나는 상관 없는 일에 상관
없는 꿈을 꾸곤 한다는 것이 속상했다.
그렇게 한 장면씩 분해하고 조각내어 다시 맞추어 보니 아마
도 그런 꿈이 아침을 짓누른 것은 Dianna Krall의 부드러운
음성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따로 이유가
없었으므로 나는 그렇게 결론을 지었다. 오랫동안 정말 오랫
동안 CD들이 함부로 버려지듯 누추하게 종이 상자안에 웅크
리고 있었고, 나는 언젠가는 정리를 해야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어제 마침내 정리를 하였다. 아니 그러려다가 익
숙한 CD들이 자꾸만 손가락에 걸렸고 귀로 들어왔다.
이 여자 목소리 정말 부드러우네요... 그렇게 돌아보던 당신
의 헤아릴 수 없이 검은 눈동자와 팔랑이던 속눈썹과 잠깐만
요, 라며 양손에 커피잔을 받쳐들고 얌전히 다가오던 그 모
습이, 결국 궁극적인 나의 꿈이, 들먹여 졌기 때문일지도 모
른다. CD 들은 다시 상자안에 웅크리고 있어야 하는 조악한
운명으로 돌아 갔고, 나는 담배를 피워야 하는 그늘진 남자
로 돌아갔다.
일생에 다시 한번, 단 한번만이라도! 망설이고 망설이는 긴
전화기 너머의 침묵이 감지되고, 나는 그 침묵이 결국 당신
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 차리고, 이윽고
저예요. 그렇게 당신의 음성이 머언 세월을 지나 다시 들려
오는 일이 있을까? 그리고 그래 잘 지냈어? 라고 억지로 담
담한 인사를 건네는 일이 있을까? 그렇게 흐르는 그리움을
억지로 씹어 삼키는 일이 생기는 기적같은 시간이 있을까?
햇살이 이 행성을 뽀얗게 만드는 가운데, 그때 그 자리 그
하얀 파라솔 아래 우리가 함께 앉아 바람이 얼굴을 만지는
것을 느끼며, 늘 하던대로 아이스 커피와 아이스 티를 마시
는 일이 있을까? 그리고 절반쯤 되면 의미 있는 미소를 입가
에 지으며 한 모금씩 바꾸어 마시는 일이 생겨날 수 있을까?
그 자리에 말 없이 앉아, 서쪽 하늘을 물들이던 노을의 바다
에서 천천히 별이 올라오고, 노란 조명 아래 당신이 마스카
라 번진 검은 눈으로 너무나 그리웠어요. 참으려고 애는 썼
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어쩔 수는 없었어요. 그렇게
떨리듯 말하는 입술을 볼 수 있을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꿈에라도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 줄 수는 없는걸까? 아니라면
정말 안된다면 꿈조차 꾸지 않는 일이라도 안되는 걸까?
나는 동일한 얼굴의 우울과 함께 냉장고를 열었고 한참동안
멈추어 서서 그렇게 소주를 바라 보았다. 배는 고프지 않았
고 손은 제멋대로 호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새로 담배를
꺼내어 물었을 때, 벌레소리가 제법 소란 스러운 것을 느꼈
고, 주변은 공허했다. 심하군. 그렇게 중얼거린 것도 같았
고, 당신이 이름이 들린 것도 같았다. 나는 잠시 밝은 빛으
로 얼굴과 두손을 동그랗게 감싼 부드러운 오렌지색 공간을
만들며 라이터로부터 불을 옮겨 왔다. 지나치게 우울했고,
쩔쩔 맬 정도로 그리웠다. 아마 오늘은 어제, 또 그저께 또
그보다 더 훨씬 전처럼 특별히 당신이 떠오른 날이었고, 소
주를 깨어진 크리스탈로 덕지덕지 이어 놓은 심장에 부어야
할 또 다른 날이었다. 그리고 꿈을 꾸지 않기를 바라는, 당
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고독한 은수원 사시나무 아래, 잠시
바람이 머무는 저녁이었다.
세 그루의 소나무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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