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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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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엄마


BY 쟈스민 2001-06-22

며칠후면 친정 엄마의 기일입니다.

그분은 스물 하나의 나이에 종가집 큰며느리로 오셔서

딸 셋, 아들 둘을 두시고 유복한 가정을 꾸리셨습니다.

큰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두메산골로 시집을 오신지라

들일, 밭일 마다 않으시고 집안의 대소사 식솔들 거느리시랴

자신을 돌볼세도 없는 그런 세월 사셨으리라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에야 미루어 짐작됩니다.

고래등 같은 집, 그 많은 전답 다 팔아 제가 국민학교 4학년 되던 해

에 아이들 교육을 위하여 더 넓은 세상으로란 명분으로

이곳 대전으로 이사를 하였지요.

물좋고, 산좋은 그 순수한 자연속에서 자연인으로 살다 오신

엄마는 이곳 대전에서 2층 집을 사서 1층에 슈퍼를 하셨답니다.

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장사란

언제나 비껴가는 행운이었는지 자꾸 기울어지는 살림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만 해도 그럭 저럭

경제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었지요.

도중에 아버지께서 운수사업을 시작하셨는데, 그것도 인연이 닿지 않

았던지 중도에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후에도 엄마의 마음에 많은 상처를 남기는 일들이 있었고...

이러 저러 마음고생이 심하셨던지 여러 해 동안 참 많이도

아프셨습니다.

맏딸인 저는 부뚜막에 앉아 밥을 안치고, 동생들 도시락을 손수 챙기

면서도 영어 단어를 외우고, 지금 생각하면 참 무던히도 학교생활에

충실했던 것 같습니다.

사춘기의 아이들이 갖는 정신적 혼돈 그런것에 빠질 여유도 없이

엄마의 자리를 메꾸어 가면서 학생의 본분도 다해야 했습니다.

마음의 방황도 많았지만, 그래도 절 예뻐해 주시는 선생님들이 그땐

참 많이도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다 하자면 소설을 써야 할 테지만

단오 그 무렵의 엄마 기일이 다가오는 해마다

잊을 수 조차 없는 그 아픈 기억들이 가슴속을 마구 헤집고 지나갑니

다.

울 엄만 다른 건 몰라도 울 아빠가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전부인

그런 분이셨다는 것 하나는 지금도 생생합니다.

오로지 한 남자에게 모든 것을 건다는 것

행복하기도 한 듯 하고, 좀 쓸쓸하기도 한 듯 한

그런 부분인 것 같습니다.

아직도 아쉬움이 있다면 한 남자에게 모든 것을 다 건 만큼

강한 의지력으로 자식을 위안삼아 왜 좀더 독한 마음으로 살지

못했을까?

그런 것 때문에 참 많이도 안쓰러워 하고, 미워도 했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어디엔가 지친 몸을 기대고 싶어하는 듯 합니다.

저 역시 두 아이를 키우며 오랜 시간 직장엘 다녔기 때문에

참으로 많이 친정 엄마에게 기대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필요를 채워줄 그 분의 자리가 아닌

진정 행복한 여자로의 일생을 사시는 엄마의 모습을 그렇게도 바랬

는데 그게 잘 안되어 마음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전 복이 있는 사람인지 자상한 시부모님들을 만나

친정 엄마가 딸에게 주는 그런 보살핌 받으며

이태껏 두 아이들 키워주시고 이만큼 직장엘 다닐 수 있게 해 주신

그림같이 고우신 두 분 시어른들이 계십니다.

어쩌면 먼저 떠나신 친정 엄마께서 제게 보내주신 마지막 선물이란

생각도 듭니다.

늘 너무나 많은 것을 주시기만 하는 그 분들을 대하면

왜 그리도 친정엄마가 그리워지는 걸까요?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마음적으로 든든했을까?

그런 마음 때문에 종종 보낸 불면의 밤들이 떠오릅니다.

마음속에 그리도 큰 사랑을 키워가며 사셨던

친정 엄마가 오늘은 몹시도 그립습니다.

하지만 가슴 저 밑바닥에서 이는 아린 아픔까지는

지금쯤 아름다운 세상에 계실 엄마께 들키고 싶질 않습니다.

돌아오는 주말에는 꽃 한다발 안고

엄마를 뵈러 가고 싶습니다.

딸이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드리면서.....

좋은 모습만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살아생전에 하지 못하던 가슴속의 말 까지

다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