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를 돌려놓고 잠시 내려다본 아파트 뒷뜰 정자 마루에
며칠 전부터 얇고 작아 보이는 꽃무늬 이불이 하나 깔려 있었다.
평소에 없던 것이라~ 유심히 눈여겨보다가 낮 시간 더위를 피해
손녀 데려와 그 곳에서 가끔 쉬었다 가시는 이웃 할머니의
건망증 때문에 떨구어진 포대기리라~ 생각하고 말았더랬는데...
저녁나절 공원으로 자전거를 타러 나서다가 아랫집 여자에게서
그 얘기를 들었다.
"저 남자 때문에 못살겠어.... "
"웬 남자...?
"저 뒤... 정자에서 자는 노숙자..."
"노숙자? 정자에서?..."
"며칠 전부터 정자에 이불 깔고 와서 자잖아..."
"으응 그 이불이 그 이불이었구나...
나는 웬 할머니가 손녀 포대기를 떨구고 가셨나 했지..."
"그런데 왜...그래요? 행패를 부려요?"
"아니 ...행패를 부리는 건 아니지만 무섭고 지저분하잖아.."
'... 무섭고 지저분하다... 그래서?'
나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노숙자라 불리는 어떤 남자가 며칠 전부터
저녁나절이면 그곳에 와서 밤을 지새었다는 것을.
그를 몰아내려 경비아저씨가 나섰다 실패하고,
관리사무소에서 나섰다가 실패하고,
119까지 왔다가 실패하고 돌아갔으며
마지막으로 파출소에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까지...말이다.
지나는 생각으로야~ 누군들 좋을리 없겠지만,
남을 해꼬지 하는 것도 아니고, 지나는 이에게 행패를 부리는 것도
아니라면, 천년 만년 그 곳에 있을 것도 아닐텐데...
다들 너른 집에서 잘먹고 잘 살면서~ 없는 이 불쌍한 마음에
밥 한 그릇 퍼다 주지는 못할 망정 앞뜰도 아닌 뒷뜰, 거의 비어
있다시피 한 그 정자에서 그가 밤잠을 좀 청하기로 서니 무어 그리
몰아 내기까지 해야 할 일이냐...? 라고...말하려다가
입 꾹 다물고 서 있었다. 다들~ "그럼 당신 집에 데리고 가 살지 그러냐?" 며 노숙자 그에게로 보내던 화살을 내게로 날릴까 봐 내심 겁났기 때문이었다.
여름날의 늦은 어둠이 내려앉고 붉은 가로등불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한 공원을 서너 바퀴 돌다가 공원 뒤를 돌아 그가 누워 잔다는
정자 근처로 슬그머니 가 보았다.
얇은 이불 하나만 덩그러니 정자마루에 펼쳐져 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먹은 것을 소화시키려고 애꿎은 힘을 소비하고 있는 이 시간,
늦은 저녁을 해결하러 그는 어느 거리쯤을 서성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란 생각 끝에, 집으로 돌아 와 지갑에서 지폐 서너 장을 꺼내어
청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고 아파트 뒷 뜰로 내려갔다.
불빛만 엷게 정자를 비추고 있을 뿐 아무도 없었고 아무도 없음이
참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 이불 밑으로 마치 도둑질하는 사람처럼
손발을 덜덜 떨어가며 청바지 속 지폐를 꺼내어 밀어 넣었다.
잠시 들추어진 이불 밑에서 아주 고약한 냄새가 불쑥 튀어나와
나를 갑자기 두렵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한달음에 집으로 올라와 어둠 속 정자를
베란다에서 열 두 번도 더 내려다보며 혹이라도 그가 그 돈을 못
보는 건 아닐까? 아니면 그 대신 다른 이가 그 돈을 주워 가지는 않을까...
하는 쪼잔한 걱정을 태산처럼 하며 서 있었다.
아주 늦은 밤 다시 베란다에 선 후 어둠 속에서 불룩해진 이불을 눈으로
확인하며 노숙자 그가 돌아와 잠자리에 든 것을 알았고, 조심스레 베란다
창문을 닫으며 결국은 누군가에게 질질 끌려서 그 정자를 떠나기 전에
그 스스로 내일 아침 홀연히 정자를 떠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
잠자리에 들었다.
그 누구에게 무얼 달라 하지도 않았고,
그 누구를 해꼬지 하지도 않았으며,
자기를 몰아내려 온 건장한 남정네들을
행패부리지 않고도 돌려 세웠다는 ...
저 아래 정자에 잠들어 있는 얼굴도 모르는 노숙자 라는 그가
왜 나는 얼토 당토않게... 도시로 길을 잘 못 든 '킬리만자로의 표범...'
같다는 생각이 잠자리에서 불쑥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어제
작은 꽃무늬 이불이 사라진 정자를 내려다보다 노숙자 그가
떠난 것을 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떠난 것이 아니라 ~
결국은 그를 몰아내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가.
그 '킬리만자로의 표범...'같은 느낌을 내게 주던 그를 말이다...
그가 정말 내 느낌같은 사람이라면 그저 잠시 측은함에 황망히
이불 밑에 넣어 두고 온 지폐 몇 장이 그에게 어쩌면 모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어젯밤 잠자리에서 또 불쑥 들었다.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그렇게 사는 그와
이렇게 사는 우리사이 킬리만자로 같은 거대한 산 하나
우뚝 놓여 있다면, 그를 몰아 낸 우리와~ 그렇게 사는 그...
둘 중 하나는 분명히 그 산... 의 표범... 맞을진대(?)
그? 아니면 우리? ...모르겠다... 정말.
(날씨가 더우니...참 말도 안되는 생각을 다 하고 앉아 있다. 나도.)
노래나 들어야지...그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