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당신에 대한 기억은 시커멓게 타들어간 입술과,
움푹패인 두눈,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
만삭이 다된 임산부 처럼 부어오른 배를 안고 누워 계시면서
어머니께서 달여 주시던 한약을 받아 드시던 기억 뿐입니다..
내 유년기는 그래서 아주 고독하게도 마당 한 가운데 깔아둔 멍석에
재탕을 하기 위해 널어 두었던 한약부스러기 속에서
감초를 찾아 먹으면서 매일 촉촉하게 젖은 새로운 약재 부스러기가
널리기를 기다리면서 꽤 많은 날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당신이 겪고 계신 고통이라든지 8남매를 두고 쓰러져 계시는 남편을
수발 하면서 타들어 가는 어머니의 애달은 슬픔 따위는
어린 내게는 보일리 없었고 감초가 주는 쌉싸름한 단맛을 즐겼던
철부지였습니다.
당신은 당시 간암이라는 사형선고를 받고
8남매 자식과 젊은 아내를 두고 차마 눈감지 못할 처지임을
잘 알면서도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찌들어 버린 양분 다 빠져나간
마른 풀잎 같은육신과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투쟁하다 다치고 찢긴 상처 투성이인 영혼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눈 감을 수 밖에 없었던 내 아버지,
당신은 그렇게 홀연히 가랑잎 처럼 떠나셨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떠나시고 벽에 걸어둔 초상화가 퇴색되어
빛바래어 갈 즈음에야 당신의 부재를 깨달으며
당신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부림 하며 가슴 깊은 곳에서
외로움으로 절규해야만 했던 소녀시절이 있었습니다..
그토록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 갈 때 마다 차마 입 밖으로
아버지,당신의 이름을 불러 보고 싶었지만 가슴속으로만
사무치게 불러 봤던 내 아버지!...
당신을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어느새 막내 딸인 제가 어른이 되어
이 한 많은 세상을 눈 감을 수 밖에 없었던,
그 절대적인 당신의 아픔을 조금은 이해 할 듯 합니다...
그런 당신을 실로 오랜 시간 가슴속에 접어 두고
35년만에유골만 남은 당신의 모습만이라도 뵐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 당신께 올리고 싶은 말들을 조용히 떠올리면서
기차를 타고 내내 혼자 마음으로 되뇌어 보고
또 다시 고쳐 보면서 당신 곁으로 갔습니다..
(아버지 유해는 오빠들이 모시고 먼저 올라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막내 딸에게 당신은 유골만 남으신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지 않으셨던지,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워 했던 이 마음도
헤아려 주시시 않으신 채, 어느새 차디찬 땅속으로 묻히시고
한줌 흙으로 당신을 덮어 드려야만 했던 막내 딸의 마음을
당신은 조금이라도 아시는지요?...
아버지!!!..당신 앞에서 이 가슴에 묻어 두었던
모든 이야기를 통곡으로 대신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아버지,당신 가신지 29년동안 8남매 자식 탈 없이 길러
시집 장가 다 보내시고 당신 몫까지 해 내느라 허리가 휘어지고
끊어지는 고통을 이겨내며 허기진 배 부여안고인고의 세월 보내왔던 당신의 아내, 내 어머니께서는 그 때서야 세상의 미련 버리시고
당신 곁으로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돌아가신 후에도 떨어져 있어야만 했던 두분을 어머니 가신후
6년만에 같은 산소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유해를 고향의 섬에서 어머니가 계신
경기도 삼성공원 묘지로 모셨습니다...
이미 두분의 영혼의 만남은 저승에서 있으셨겠지만
한 때 부부라는 인연으로 같이 했던 두분의 육신은
이미 흙이 되어 버리셨지만 남은 유골만이라도
조금은 늦은감 있지만같이 만나게 해 드릴수 있었던 것에
감사드립니다..
부디 영혼이 머무르는 다음 세상에선 평안한 안식을 누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