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모처럼 아들자랑을 하신다. 하루도 걸르지
않고 안부전화를 해서, 늙은이 걱정 말고 너나 차
조심하고 다녀라. 운전하면서 헨드폰 하는 게 얼
마나 위험한데... 하면서 잔소리를 끓여 붓는다나?
외아들에, 소심한 성격이라 얼굴에 늘 짜증을 달고
다니던 놈이었다. 막내에 아들에, 나는 이 동생을
어떻게 하든 잘 가르쳐 쓰러져 가는 이 집안의 기
둥을 만들까 애를 썼었다. 그러나 공부에 크게 뜻
이 없어 간신히 이름없는 대학을 나올 수밖에 없
었다. 그리고는 하는 일마다 풀리는 것이 없었다.
서른이 훨 넘어 결혼을 하고 지금은 분가해 따로
산다. 결혼 후에도 직장과 돈벌이가 시원치 않아
엄마는 늘 며느리에게 죄지은 듯, 집에 있는 것
은 뭐든 꾸려 보냈다. 쌀, 김치, 밑반찬 하다못
해 간장, 식용유까지...
그러나 올케 성격 역시 제 서방과 비슷해 도통
잔정이 없는 아이였다. 외며느리든, 장손이든,
무신경이었다. 시부모 생신이나 제사, 그리고
명절차례도 제가 서둘러 준비하는 법이 없었다.
며느리가 모른체 하니 할 수없이 딸 차지...
친정 일에 매달려 사는 내 동생들은 아우성을
쳤다. 엄마가 며느리 버릇 잘못 들여 이 지경
이라고 닥달을 했다.
엄마성격도 보통은 넘는데, 며느리에게는 한수
접고 들어 가셨다. 잔소리 해서 될 일이 아니란
생각을 하셨나 보다. 영리한 노인이었다. 집안
의 가장역활을 하는 맏딸인 나, 동생들은 나를
채근했다. 언니가 저 애 버르장머리를 고쳐 놔
야지, 저러다간 두 노인네가 어떻게 되든 들여
다 보지도 않을 것 같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나도 남의 집 며느리로 들어가 시어머니
싫다고 내친 주제에 뭐 할 말이 있는가? 같이 늙
어가는 처지에 어떤 여자가 시누이 잔소리 무서
워 한다고...나는 동생부부에게 입 뻥긋 안했다.
소용이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여동생들을 다독였다. 저런 며느리 보는 것도
엄마가 타고난 분복이다. 괜히 되지도 않을 일
에 애달아 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저
애에 대해선 우리 모두 포기를 하고 엄마, 아버
지 돌아 가실 때까지 마음이라도 편하게 우리가
모른척 하자. 편찮으시면 나중에 이 집 팔아 간
병인 대면 되지 꼭 며느리 수발 들어야 맛이냐?
그리고 우리 딸들은 친정부모니까 아들, 며느리
에 상관없이 우리가 할만큼만, 마음 땡기는 만
큼만 하면 되지...언니가 이렇게 무우 자르듯이
판세를 평정하는데 지들이 별 수 있간디? 동생
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뒤로 물러섰다.
그러던 놈이 작년부터 하는 사업이 풀리기 시작
했다. 부모님 생활비도 챙겨서 드리는데, 돈 드
릴 때가 가관이었다. 제 마누라 몰래 드리고 가
느라고 처자식과 같이 와서 놀다 가면서도 돈봉
투만큼은 슬쩍 서랍에 놓고 간단다. 그리고는 나
중에 전화를 해서 엄마에게 ?아 쓰시라고 한
다니, 지 마누라가 무섭긴 무섭구나 해서 입안
이 씁쓸했다.
엄마에게 가외돈을 드리면서도 꼭 당부를 한단
다. 민지에미에겐 말하지 말라고...그렇게 궁
색스럽게 돈을 받으면서도 엄마는 마냥 행복한
가보다. 아들이 몰래 주는 용돈, 왕소금인 며느
리 모르게 한들 대수일까?
엄마의 이 작은 행복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우리 노인네 살아 계실 때 용돈은 내가 도맡아
드렸다. 아들이 돈벌이를 못하기도 했지만, 용
돈 받을 때마다 며느리 앞에서 주눅이 얼마나 드
셨을까? 내가 속이 좀 트인 년이었다면 몇번쯤은
남편 손에 돈을 쥐어줘 어머니를 드리게 했을 것
을...한번도 그 생각을 못했다.
우리 어머니 살아 생전, 아들에게 용돈 받는 작
은 행복 한번 제대로 누리지 못한 것을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 지내놓고 보니 잘못 투성이
고 죄지은 것이 이렇게 많으니, 나죽어 극락 가기
는 애초에 틀린 것 같다.
어머니 용돈 드린 뒤, 행여 남편이 또 드릴까봐
어머니, 내가 용돈 드렸다. 경고라도 하듯 못을
박던 야박한 내 행동이 부끄럽고, 속상하고, 가
슴이 쓰리다. 모든 것이 역지사지, 입장 바꿔놓
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 없으련만...뒤늦게 가슴
치는 후회를 한다.
꽃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