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시간 ... 나는 잠에서 깨어 있었다. 아니 잠들지 않았다.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자꾸만 경련이 일어나는 발을, 뜨거운 물에 잠시 담갔다 꺼냈다.
바닥면이 두툼하여 폭신하다는 느낌이 드는 면양말을 꺼내 신고
크림색 실내옷 위에 가디건을 하나 덧 입은 후
개수대에 남아 있는 그릇들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수돗물 흐르는 소리가 멎자 다시 정적이다.
미세하게 내 움직임을 따르는 숨소리만 낮게 들릴 뿐이다.
전기 히터의 전원 스위치를 누른다. 가습기 구멍으로 습기가 올라오면서 금새 코일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몸이 따뜻해 지는 대신 내 뇌세포는 결빙되는가 싶더니 이내 균열을 만든다.
거대한 얼음덩이가 갑작스레 쩍 갈라지는 듯한 그 느낌에 묘한 흥분마저 들었다.
나는 그것을 끌어 안다시피 하고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새벽이었다.
2.
우유투입구에 신문이 들어온다.
소스라치게 놀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그 소리에 왜 그리 익숙해 지지 못하는지
잠이 들어있다해도 투입구가 내는 저 소리를 모른척 하기란 쉽지않다.
정적속에서 벨이 두번 울린다.
문득 두려움이 엄습해 와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입술을 핥았다.
찬 바람을 많이 쏘이는것도 아니건만 입술은 까칠해질대로 까칠해 있다.
인터폰을 확인한다. 희미하게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스포츠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다.
인터폰을 들어 누구냐고 물어야 하는건데 ...
걸쇠를 풀지 않고 문을 연다. 조심스럽게.
열려진 틈으로 불쑥 실장갑을 낀 그의 손이 침범한다.
이어 새벽공기에 쉰 듯한 그의 음성도 들린다.
"저 .. 이거요 . 우리 지점장님이 드리래요 ."
"불이 켜 있길래 ...... "
무슨 변명같지 않은 변명을 주절거리고 있는가.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왔을까 ? 자전거를 타고 왔을까 ...?
아파트 앞에 신문 실은 그 무엇을 세워두고 화단을 건너 내 거실에서 불빛이 새어나옴을 확인하고 들어왔단 말이군 .... !
이유도 묻지 않고 냉큼 그것을 받아든 후 문을 걸었다.
서하진의 소설 '라벤더 향기' 작은 소리로 책의 겉표지를 훑었다.
'삶의 모욕을 견디는 불온한 사랑 ???'
'이걸 왜 내게 주는거지 .. 왜 ....?'
나는 쉽게 책을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라벤더 향기 .........
3.
내가 읽은 분량은 42쪽이다.
무슨 내용인가 ... 글씨만 눈으로 읽어내린게 분명하다.
다시 처음 페이지로 돌아가야 한다.
책의 맨 앞장에 작가 '서하진'의 사진이 실려있다.
그의 약력도 정리되어 있다.
책을 덮어 버렸다. 읽고 싶은 마음이 가셨다.
휴대폰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울린다. 받지 않는다.
'부재중 전화' 가 찍히겠지 ...
확인한다. 아침부터 걸려온 부재중 전화는 모두 다섯통이다.
라벤더 ... 허브의 한 종류지 아마 ...
'토요일 오후였다 ..'
서하진은 그렇게 글을 시작하고 있다.
내가 담배를 할 줄 안다면 ...
독한 담배 한대 피우면 좋을것만 같다.
낯선 도시에서 낯선이와 깨름직한 정사(精事)를 나눈 기분이다.
11월 ... 어느날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