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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도 좋은 것들 1


BY hyesol 2001-05-11


부와 명예와 권력을 누리는 자는 귀족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유명한 정치가 재벌
탤런트 심지어 나와 같은 시인도 귀족이 될 수 있다. 귀족은 명성에 정비례하고 자유와
익명성에 반비례한다. 그래서 나는 귀족이 누리는 명성을 '없어도 좋은 것'으로 생각하
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귀족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명성 대
신에 자유와 익명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조그마한 체험을 통해 내 생각을
확인하고 있다. 해질녘에 나는 남편과 함께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를 산책하곤 한다. 우
리에겐 참으로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우리의 산책이 번번이 방
해를 받곤 했다. 우리가 산책길에 데리고 다니는 빛나는 혈통을 가진 개 때문이었다.
배티는 뾰족한 주둥이에 황갈색 털을 가진 셔틀랜드 쉽독이었는데 참으로 잘 생긴 개
였다. 로데오 산책길에서 이미 名物이 돼 있었다.
" 저기 봐, 래시가 가고 있어. 영화에서 봤잖아. 어쩜 저리 닮았을까."
우루루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삥 둘러싸고 서서 배티를 구경했다. 배티의 팬 중에는
유독 젊은 미녀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어김없이 배티를 어루만지곤 했다. 행인이 많은
길목에선 으레 이랬다. 그러자니까 산책인들 어찌 맘대로 할 수 있었겠는가. 시인인 나
보다 개한테 쏠리는 관심을 보고 잠시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내가 유명한 시인
이 아닌 게 참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내가 만약 모든 사람들
이 알아보는 유명한 시인이라면 얼마나 내 산책길이 불편했을까. 불편해도 좋으니 한
번 유명해 봤으면 좋겠다, 이런 속기가 끼어 들 구멍이 없을 만큼 익명의 바다에서 내
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완벽했다. 어깨를 부딪치며 사람들 틈을 비집고 걸어가도 내게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됐다.
내가 남루를 걸치고 다녀도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사람
들의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됐다. 공기처럼 자유롭게 거리를 흐르며 나는 군밤이나
솜사탕을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었고 삼류극장을 찾아다니며 밤 깊도록 철 지난 영화
도 볼 수 있었다. 폐 일언하고 카페 '줌'에서 그냥 죽치고 앉아서 종일 사랑을 속삭이며
나는 내 자유를 맘껏 구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하찮은 유명세를 치르느라고 반편이
돼버린 삶을 자랑스럽다고 우쭐대고 있는 귀족들을 실컷 조소했다. 'noblesse oblige'에
생각이 미치면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르기까지 했다. 귀족은 자신이 누리는 부 명예 권
력만큼 반드시 도덕적인 책임과 의무를 다 해야 한다. 그 에누리없는 대가성 을 생각하
면 그만 숨이 턱턱 막혔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기본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도덕적인 가
치와 행위를 경멸하거나 회피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엄격한 대가를 치르고 귀족 행세
를 해야 한다면 그 삶이 얼마나 삭막하고 가식적이겠는가. 게다가 누리기만 하고 대가
는 치르지 않으려고 하는 얌체들이, 정신적인 파탄자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 많다. 요즘
사법기관이 인터폴을 통해 체포하려고 혈안이 돼 있는 김우중 같은 사람이 바로 악덕
귀족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는 이제 '세계는 넓고
숨을 곳은 많다'로 전락해 버렸으며 그는 넓은 세상 천지로 잘도 숨어 다니고 있다. 우
리 사회의 온갖 비리와 어처구니없는 불법들이 주로 이 악덕 귀족들에 의해 저질러지
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노릇이다. 모든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조금
만 도덕성을 회복해 주었어도 우리 사회질서가 이토록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지는 않았
을 것이다. 내가 만약 귀족이 되기를 싫어했다면 그것은 어떤 도덕적인 책임을 수행하
기 싫어서 때문이 아니라 시인으로서 진정한 정신적 귀족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나는 유명세를 치르면서 가면을 쓰고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았고 익명의 바다
를 헤엄치면서 참 자유인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참 자유인은 보이지 않게 자신의 삶에
대한 정의로운 약속을 지켜나가는 사람이다. 아무런 대가성 없이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 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귀족이 누리는 유명세 따위
는 '없어도 좋은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결코 'sour grape'가 아니다.
타인의 시선과 관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참다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