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그릇, 여인숙 그릇
오늘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결국 남자와 여자, 이 두 종류의 사람 외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시시각각 벌어지는 사랑의 풍경이란 어찌 그리 무궁무진한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어떤 남자가 특별히 괜찮다하는 편견이 그리 두드러진 편은 아닙니다.
굳이 이야기를 하라면 그저 머리 좋고 정직한 남자면 좋은 정도지요.
하지만 물론 머리가 좋다, 정직하다 하는 부분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조건이란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드문 것도 아니구요.
대체로 그렇지요.
똑같은 남자를 전혀 다른 장소에서 처음 만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비록 같은 사람이라 할 지라도 디스코텍에서 만난 것과, 고급스런 양식당에서 만난 것과는 그 첫인상이 다르겠지요?
오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쩌면 바로 이런 부분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대를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가하는 부분이, 어쩌면 그 만남의 시종일관을 끝까지 좌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첫인상이란 조작된 이미지 연출에 의해 엉뚱하게 바뀔 수도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그런 것을 목격하잖아요.
수수하고 성실한 시골집의 가장으로 성실한 이미지를 보여주던 중년 배우가, 느닷없이 퇴물 제비로 분하여 빙충맞은 인상을 준 적이 있었으니까요.
성실한 가장과 퇴물 제비.
그 상반된 이미지를 결국은 한 배우의 완벽한 연기로 둘다 그럴 듯하게 보이게 했으니 대단한 일이죠.
나는 비단 배우 뿐 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게서도 그런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고등학교 동창 중에 일명 '날라리'라 불리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공부에는 전혀 관심없고 그저 불량한 아이들끼리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온갖 말썽을 다 부리던 아이였지요.
그 아이가 훈육 주임 선생님께 야단맞는 것을 자주 보고 그랬어요.
게다가 불량한 남학생과 안 좋은 장소에서 적발되어 정학이란 처분까지 받았었답니다.
그러던 그 아이를 졸업 후 20대 중반 쯤에 명동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지요.
그 아이옆에는 아주 단정하게 보이는 남자가 함께 있었어요.
그때 나는 웬지 그 아이의 예전 이미지때문에 아는척 하기를 주저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런 나를 발견한 그 아이는 처음에는 오랫만에 동창을 만난 반가움에서인지 먼저 아는 척을 했어요.
그리고는 나를 그 남자에게 소개하더라구요.
저도 물론 인사를 했지요.
그랬더니 그 아이의 남자는 동창이라는 말에 나를 아주 반색하면서 굳이 근처 커피숍에 함께 가자는 거에요.
그래, 몇 번 사양했지만 이미 먼저 만난 제 친구와는 헤어진 후라 그들과 잠시 합류할 수 있었어요.
이런 저런 인사끝에 우리가 자리에 앉자 그 남자가 제게 그러더군요.
그 아이가 얼마나 순진하고, 여성스러우며 착한지 그런 점에 이끌렸다는거에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일순 그 말을 하는 그 남자의 표정과 그 아이의 표정을 번갈아보게 되었지요.
그건 아주 가관이었답니다.
그 남자는 그렇게 말한 자신의 생각이 아주 확고하고, 조금도 그 생각에 다른 여지가 없다는 표정인데 반해, 그 아이는 다소곳이 고개를 푹 수그린채 애써 날 외면하고 있더라구요.
그때서야 나는 알아챘지요.
그 아이가 물론 졸업 후에 좋은 쪽으로 변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뭐가 어떻게 되었건 간에 그 아이는 아주 완벽한 자기 연출을 함으로써, 그 남자에게 아주 좋은 이미지를 심어준 겁니다.
그야말로 그 남자에게 만큼은 여인숙 그릇이 호텔 그릇으로 완벽하게 탈바꿈한 것입니다.
아주 머쓱했어요.
하지만 그 남자의 그 마음을 인정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아이가 학교 때도 아주 착했으며, 얌전한 아이였노라고 하얀 거짓말로 그 남자에게 화답했지요.
"예. 아마 그랬을겁니다." 하며 내 말을 받는 그 남자의 표정엔 아주 만족한 미소가 감돌더라구요.
동창인 그아이는 그제서야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정말로 반갑다는 말을 여러번 되뇌였지요.
자기 쪽에 서서 가세해 준 제가 왜 안 반가왔겠어요.
그날 씁쓰레한 커피 한 잔을 그들과 마시고 돌아서 나오면서, 그들이 까맣게 멀어져 갈수록 제 웃음 소리는 얼마나 커졌었는지 이해하시겠어요?
그렇게 모처럼 아주 호쾌하게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왔었답니다.
똑같은 그릇이라도 고급 호텔에 놓인 것과 싸구려 여인숙에 놓인 그릇은 아주 다른 느낌을 줍니다.
그것은 그 제품 때문이 아니고, 그 주변의 이미지와 일종의 광배(光背)효과죠.
왜, 그거...... 예수님이나 부처님등 신성한 존재의 뒷면에 둥그렇게 그려진 빛 말이에요.
시골에 있으면 시골 아낙같이 보이게 하기가 쉽고, 도심 한 복판에선 도회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기가 쉬운 것처럼 말이에요.
전 남자를 볼 때 몇 번 현혹된 적이 있었어요.
어떤사람일까를 내 스스로 판단하기에 앞서서 보여지는 조건과 외형만으로 쉽게 단정하려 했기때문이죠.
학벌, 외모, 키, 성격 따위들.
저는 대화가 풍부한 사람을 좋아했어요.
여러 방면에 박학다식하여 사통팔달 어느 부문에도 처지지 않는 타입을 선망했지요.
주로 그런 면을 대화를 통해 확인하고자 했었는데, 그건 어쩌면 쉬운 일이었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부터는 그런 것보다는 진솔한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 더 마음이 이끌리더라구요.
좀 어눌할망정 말잔치하지 않는 남자가 더 좋은 사람이란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주 용의주도하게 조작된 이미지를 연출할 때, 전 그걸 가려낼 재간이 없거든요.
하지만 그 사람이 믿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점은 이제 확연히 구별할 수 있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한 종류의 남자만을 좋아해요.
믿을 수 있는 남자.
그게 제 기준입니다.
한 남자가 어떤 말을 했을 때 그 말이 곧이 곧대로 다 믿어진다면, 그 사람의 무엇을 더 경계하겠습니까?
또 말과 행동이 확연히 일치되는 사람인데 무슨 잘못이 그렇게 크게 눈에 띄겠어요?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함에 있어 그 기본 바탕은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지만 믿을 수없다?
과연 그것이 진정한 사랑으로 남을 수 있을까요?
제가 어떤 남자에게 진정한 사랑을 표현하는 말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보다는 "나는 당신을 믿고 있습니다."라는 말일 거에요.
또 사실 그렇죠.
사랑한다는 말은 감정에 따라 수시로 스치는 일시적인 말이
될 수 있겠지만, 믿을 수 있다는 말은 언제까지고 변함없이 그 인간성 자체를 신뢰한다는 말이 될테니까요.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굳이 말로 하지 않는다해도, 그 사랑을 받고 있는 상대는 누구보다 더 그 사랑을 더 절실히 눈치채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기침과 가난은 누구에게도 숨길 수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또 사실 그런 것 같습니다.
전 기침도 참지 못하고, 없어서 궁상떠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제는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하물며 사랑이야 오죽하겠어요?
가능하다면 최대한 자신을 결코 나쁜 환경에 두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이아몬드를 햇빛 아래서 보았더니 너무도 그 빛이 영롱하더군요.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그 맑은 빛을 발하는데, 숨이 다 막힐 정도였어요.
시골 여인숙에서건, 호텔에서건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그 본질이 순수하고 맑아야 할테지요.
본질이 순수하고 맑은 사람.
그것은 정직한 사람이고, 거짓을 일부러 꾸며대지 않는 인간성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제 자신, 그런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또 그런 사람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사랑이란 대단한 게 아니라 그저 생활의 일부인데, 생뚱하고 거짓으로 범벅되어 앞뒤가 안맞는 상대를 평생 사랑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만약 무슨 말을 해도 '정말일까?'하고 우선 의심부터 드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설령 호텔 그릇이라 할 지라도, 여인숙에서 허름한 식사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요?
칵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