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지 만 7년 두번째 아일 낳고 두번째 분만휴가중이다.
다들 그렇지만 내 인생은 결코 만만하거나 한가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갑자기 텅비인 60일간이 부담스럽기조차하다니 아직도
고생을 덜했나?
우울증증상을 겪고 있다.
내가 별로 소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때문에 첫아이땐
우울했고 지금은 그런 사실의 확인으로 더욱더 우울하다.
남편은 더이상 아기가 신기하거나 예쁘지 않은거 같고
아일 낳았다고 둘째라 몸조리를 잘하리라 맘먹고 게으름부리고(?)
유세를 부리는 내가 아니꼬운게고 큰애는 나름대로의 기득권
(엄마로부터 받은 사랑에대한)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더 심술을 부리고...
선녀와 나뭇꾼에 선녀가 애를 셋인가 넷인가 낳을때까지 절대
날개옷을 주지말라고 당부했던가? 그래서 셋일땐 양팔에 안고
다리에 끼고 올라갔대나 어쨌대나
요지는 애를 안고 올라갈 수있는 최대의 수가 아니고 세월이다
세월이 흘러 애를 셋쯤 낳고 나면 제아무리 선녀라도 별수없는
나뭇꾼의 아낙이 되어 포기하고 살게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웬 선녀와 나뭇꾼타령? 나두 이제 애가 둘이니 (셋 혹은 그이상
낳기도 하지만 대개 둘이면 이시대의 최대평균이니까)별 수없을 거라는 낭패감도 있지만 아줌마의 여유도 생긴다.각설하면 십년도 넘은
남자애를 추억해도 괜찮을 거라는 내 변명이 이토록 길어지는 거다.
지방에서 남녀공학인 고등학교를 나온덕에 남자동기중에 날 좋아했던 아이가 있었다.80년 후반 외인구단이 만화에서 영화로 제작되고
그때 주제음악이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수있어'
뭐 이런 가사가 있었다. 그애와 난 연애를 하거나 데이트를 한거도
아니였지만 (오히려 내가 피해다니고 싫어했었지)그애로부터 받은 몇통의 편지중 하나에 적혀있던 '난 네가..'의 노래가사와 서울역에서 기차타고 백마에 가서 돌아오는 형편없이 흔들리는 기차안에서 내 어깨를 잡았던 그애의 손의 떨림이 기억나니 내가 참 주책인가
암튼 비교적 일찍 결혼한 내가 스물여섯에 큰애를 낳고 우울증을
느낄 때 생각난 그애의 연락을 찾아서, 그래 그때는 호출기에 내 전화번호를 남기고 1분도 안되서 전화가 왔지.대학교2학년때인가?
군대간다며 날 찾아와서 잠깐 보고 간후 소식도 없었으니 몇년만인지
'호출하신 분을 부탁합니다.'
'혹시 강창준씨 맞나요?'
'네 누구시죠?"
'나야 민희"
'민희?너 정말 민희 맞아? "
"응 잘 지냈니?'
'잘지내 거기어디야? 난 여기 청주인데 낼 서울 간다 모레가
졸업식이거든 ,모기업에 취직해서 여기 내려와 있지. 너 집이니?
왜 집전화번호가 바뀌었지?이사했니?'
너무나 반가워하는 목소리,여전히 기억력좋고 숫자에 예민하던
그애는 내친정전화번호와 호출기에 찍힌 숫자의 차이를 발견하고는
이사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그애에게 나는 한동안 말을 하지못하고
있었다.하긴 아직 그앤 학생이니까 아줌마라는 엄청난 신분의 변화
를 겪은 나를 상상하지 못했겠지 그때는 겨우 스물 일곱이었으니까
암튼 난 담날에서야 내가 결혼한 사실 애낳고 분만휴가중이라 집에
있다는 엄청난 사실을 그애에게 전하고 결국 만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나는 임신후 불어버린 체중이 아직도
덜빠져서, 적당한 외출복도 아직 없어서. 그래서 못만난다는
그런 의미였을지도 모르는 그말에 그는 몹시도 놀랐고 믿지못하는
거 같았다
'결혼?아이?우리가 벌써 그럴 수도 있는 나이구나'
그 후로 남편이 연락없이 늦는 날에는 몇번 전화를 해서 범 남자들의 무책임함과 무심함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지만 그의 복잡하고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리기에는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거 같다.난 단지
이름부르며 반말해도 되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게 좋았고 그애가
한때 날 좋아했었다는 사실만으로 내신분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웬만큼의 오만까지 가지고 그에게 함부로 전화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그러나.결국 나의 심리적 허영심은 어느날 저녁.무너져 버렸고 아줌마는 더이상 총각에게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뭐해?/저녁먹는 중이야/여자목소리도 나네./친구야./여자친구도 있어?/
그럼 많지 임마 넌 결혼두 했는데/
그후로 난 더이상 그에게 전화를 걸 수 없었고 호출기에 찍힌 내
번호를 알면서도 한번도 먼저 전화하지 않았던 건 기혼녀에 대한
배려가 아닌 경계였다는 것을 생각하니 심각한 감정의 손상을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허둥지둥 무너진 자존심을 수습하기위해
그를 의식하지 않기로 하고 비교적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서 또 그 노래가사가 떠오르는 건 정말로 환장할 노릇이다.
내가 또 왜 이러나.주책,미쳤니정신차려야지
동창회하는 인터넷사이트를 죄다 뒤져도 그의 이름은 없었다
남자들은 웬만하면 고등학교동기들 만나고 그러든데 얘는 두문불출
하나? 혹시 그럼 대학동창회주소록에는?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이번에는 너무나 쉽게 청주의 지역번호가
있는 전화와 호출기가 아닌 휴대폰의 전화번호를 알수가 있었다.
견물생심 이미 바뀐 전화번호이거나 없는 번호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휴대폰벨소리가 울리고 웬남자가 전화를 받았지만 나는
확인하지 못한채 전화를 끊어 버렸다 .육년전 그후로 한번도
전화가 없던 그에게 더이상 친구나,동창의 자격으로 전화를 한다는게
우습게 여겨지기때문에
그는 결혼을 했겠지 아이도 있을거야
좀 피곤해 보이는 아저씨 목소리든데 그애의 목소리가 그랬었던가?
그냥 친구로 옛날이야기하며 가끔 전화도 하고 만나보고도 싶다면
내가 바람이 난걸까?
아님 그냥 소시적 그런 유치한 편지를 받은 적도 있고 지금도
그런 편지를 받아보고 싶다는 허황된 꿈이나 가지며 살아야 되는 건지
암튼 오늘은 너무 꽉 조여서 입고 나면 화가 나는 비싼 콜셋을
입고도 참을 수있는 건 코골며 자는 남편을 생각해서는 아닌 거같다
혹시 그에게 전화를 해서 그가 날 보자고 한다면 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미안해 난 둘째아일 낳고 휴가중이야 실은 외출복이 없어서
못나가 우리 안만나는게 나을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