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에
날카로운 칼날이 명치께를 싸악-긋고 지나는 듯 하더니 이어 쿡 쑤시는 듯한 통증이 나를 곤한 잠에서 일으켰다 한동안 괜찮다고 방심했더니 일주일 전부터 먹고 있는 감기약이 위장을 자극한 모양이다 위장 보호제를 함께 먹어줄걸 하고 후회하면서 손가락으로 아픈 부위를 힘껏 눌러 보지만
고통은 더욱 커지고 금방이라도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다
옆에서 곤히 자는 남편과 아이들이 깰세라 가만 가만 이불을 빠져나와 거실로 나왔다
10 여 년 전부터 잊을 만하면 찾아드는 이 불청객, 새벽녘에 단잠을 깨우며 고통 속으로 밀어붙이는 위장의 통증이란 어느 정도라고 표현하기 어렵게 고통스럽다 위벽을 갈아 먹는 위산을 희석 해 볼 량으로 따뜻한 물을 한 컵 가득 먹어 보았지만 금방 올려내고 말았다 대책이 없다 체념하고 시간이 흐르길 기다릴 밖에. 지금까지의 경험으론 보통 고통은 두시간 안에 끝난다 그런데 그 두시간이 얼마나 긴가 ! 평온한 10시간과 맞먹는 것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퍼지는 고통에 시달리다 보면 건강하지 못한 내 위장이 저주스럽다
찬바람을 쐬면 좀 나을까하여 마당으로 나왔다
밤하늘은 내 고통과 상관없이 참 고요하다 .
둥근 달이 열 개도 안되는 별들과 함께 한가로이 빛나고 가끔 부는 바람이 짧은 소매아래로 드러난 맨 살에 차갑게 스친다 인기척이라곤 없어 겁 많은 나는 무섬증이 불쑥 일어 움츠려지는데 마당 저 끝 구석에서 가만히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예삐라는 개다.
곤히 자다가 내 인기척에 깬 걸까 아니면 여직 잠을 못 이루고 있었던걸까 끼잉..끼잉...작은 소리로 자신이 거기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나는 반가워서 얼른 예삐에게로 가서 가만히 말을 건넸다
"너도 안자고 있었니?"
예삐가 마구 꼬리를 흔든다 창고 문고리에 묵여있는 개고리가 흔들리면서 개고리에 붙은 방울이 딸랑 딸랑 소리를낸다 적막하기만 하던 밤이 흔들렸다
"쉿!"
아이들과 남편이 깰까봐 내가 주의를 주었다
예삐는 금방 발아래 착 엎드린다 꼭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아 기특한 마음이 든다 하기사 짐승이라고 해서 느낌이 없을까 처음 왔을 땐 밤마다 어찌나 요란하게 짖어대던지 내가 빗자루를 들고 나와 으름장을 놓곤 했다
그러나 그때뿐 얼른 제 집 속으로 들어가 조용히 있다가 내가 방으로 들어오면 더 시끄럽게 짖어대니 아침이면 이웃 분들이
"그 개 젖은 땠수?"
하고 물어 보곤 했다 젖도 안 땐 걸 데려와서 어미 젖 생각나서 우는 것 같다는 것이다
예삐를 데려온 작은 시누이 님에게 이야길 하니
"젖이야 땠지만 어미 생각이 나지. 어미는 어쩌는줄알어? 밥만 주면 새끼 찾아다녀. 다른 새끼 다 있는데도 그놈 찾아다닌다니까? 그러다 제 밥 새끼들에게 다 빼앗기고 말면서도 나중에 또 그런다니까?"
하셔서 그만 데려다 줄 생각도 하였건만 네 살배기와 여덟 살 된 딸아이 둘이서 펄쩍 뛰어 그냥 두게되었다
내가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에 더 견디질 못하고 아.. 신음 소릴 내며 엎드리자 예삐가 끼잉..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울며 내 손과 발을 ?았다 아파서 어쩌지요 하고 염려하는 듯하다
그새 감기 걸린 작은아이가 콜록 콜록 뱉어내는 기침소리가 창문을 지나 들려왔다. 그러자 내 발을 ?던 예삐가 벌떡 고개를 들고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목에 매달린 끈이 허락하는한 까지 창문가까이 다가가 올려다보는 행동이라니! 내가 작은 소리로 이름을 불러도 들은 체 만 체였다
나는 그만 측은해졌다 오 개월 전 어른 주먹보다 조금 큰 강아지인체로 왔을 때 아이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던 예삐였다 딸아이들은 수컷인 강아지에게 예삐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품에 안고 다니며 저희 과자를 입에 넣어주었었다
놀러 나갈 때는 꼭 데리고 나가고 아침에 눈뜨기 무섭게 예삐에게로 달려가곤 해서 아빠에게 한소리 듣기 일수였다 . 그러나 두달쯤 지나 강아지 티를 벗어나자 아이들은 더 이상 예삐를 안고 다니지도 않았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도 않았다 그리곤 예삐가 묶여있는 창고 근처에도 안왔다 성견이 되어가는 예삐에게선 개 특유의 냄새가 심하게 났고 이젠 제법 굵은 똥을 싸놓은걸 보고 더럽다며 기겁을 하며 도망갔다
나는 처음 아이들이 예삐를 두고 밖으로 놀러 나가던 날을 기억한다 그때 예삐는 어느날처럼 아이들이 현관문을 박차고 나오자 목을 길게 빼고 현관 쪽을 쳐다 보고있었다 아이들이 자신을 데리고 나갈 거라는 기대감에 충만한 체. 그러나 아이들은 빨래를 널고 있는 내옆을 지나 그냥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고 예삐는 잠시 귀를 세우고 보더니 이내 컹컹 짖어대었다
나를 잊어버렸어 나도 데려가야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그랬고 그런 날이 며칠 되풀이되자 마침내 포기한 듯 그저 아이들이 나가는 걸 쳐다보기만 했다 처음 우리 집에 와서 밤마다 어미를 찾아 짖어대다 며칠만에 포기하고 조용해졌듯이 ..
그러나 여전히 아이들을 보면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 하는 걸 본다. 자신에게 태무심 해저버린 아이의 기침소리에 조차 신경을 곤두세우는 예삐를 보니
큰 시누이님 생각이 난다 큰 시누이님은 10여년 같이 살던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다 사랑하는 아이들도 빼앗기고 돈 한푼 없이 입은 체로 ?겨나 남의집 가정부로 전전하던 처지에 재가도 안 하시고 수 십 년 을 혼자 사셨다 명절에 한번씩 오시면 버릇처럼 오래 전에 재혼해서 잘 살고 있는 전 남편 이야기를 하셨는데 원망보단 그리움이 가득하여 내가 속이 상하였다
대책없는 상사병을 안고 살다 쓸쓸히 돌아가신 그분을 나는 속으로 바보라고 많이 나무랬다
한번 준 정을 쉬 잊지 않는 것이 여인의 미덕이라고 하지만 정작
잊어야 할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도 큰 병이다 끔찍하게 아프다가도 두 어 시간 지나면 씻은 듯이 고통이 사라지는 내 위장병에 견줄 바가 아닐 것이다
예삐의 상사병이 어찌 그분의 그것과 다를 바 있으랴 나는 하루빨리 예삐가 아이들을 자신의 신경 줄에서 끊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삐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예삐는 더이상 창문너머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안들리자 가만히 내 발아래 엎드렸다
그러나 금새 작은 아이 기침소리가 콜록 콜록 들려오자 저를 쓰다덤는 내 손은 아량곳 않고 발딱 일어서더니 창가로 가버렸다 그리곤 혹시 아이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지나 않을까 ,절 부르는 소리라도 들리지 않을까 해서 쳐다보고 섰다
나는 치료제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 아물고 말 내 위장병에 대한 저주를 거두고 일어섰다
현관으로 걸어오다 돌아보니 예삐는 여전히 창문을 우러르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며 다시 한번 쳐다보아도 그대로였다
적막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