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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휴식


BY 쟈스민 2002-05-15

정말 오랜만의 산행이었습니다.

일년에 두번 봄, 가을로 가는 직장에서의 체육대회 ...
이번에는 좀 먼 곳 지리산으로 발길을 향합니다.

산은 늘 그렇게 그 자리에서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는때부터
우릴 기다리고 있었나 봅니다.

평소에 자주 등산을 할 기회가 없는 나에게
산은 정복해야 할
조금쯤은 두려운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먼곳까지 몇시간씩 버스를 타고 와서 시작되는 산행을
흐지부지 산 아래에서 바라만 보기엔 너무나 많은 아쉬움이 남을것만 같아
애써 용기를 내어 봅니다.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아내며 숨을 고릅니다.
한참이나 깍아지르듯 비탈진 언덕을 나무들이 무리지어 만들어진 터널을 지나
무던히도 올랐습니다.

우리가 가기로 예정된 곳은 지리산 바래봉, 그리고 철쭉군락지라 하였습니다.

헌데 어찌된일인지 가도 가도 꽃은 보이질 않고,
오솔길로 간간히 사람들의 오르내리는 모습만 보이는 거였습니다.
너무 힘들어 오던길을 도로 내려갈 생각까지 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몇번의 휴식끝에 다다른 산 허리 자락에는
그야말로 탄성을 자아낼만큼 고운 빛깔의 철쭉들이 군데군데 무리지어
저마다의 고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분홍빛, 보라빛으로 넓게 펼쳐진 초록의 산 자락엔
온통 꽃들의 대향연이 펼쳐지고 있었지요.
어쩜 그리도 색깔이 고운지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의 색감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축복인 듯 했습니다.

산을 오를때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그곳엔 우리의 인생이 담겨져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너무 힘들어 그만 포기하고 싶은 절망,
정말 잘 참고 이곳까지 오길 잘했다는 안도감 내지는 희망까지
모두다 담고 있었습니다.

가보지 않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길을
연습없이 단 한번 떠나보는 것
그것이 인생일꺼라고 ...
산에 오를때면 다시금 그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런맛에 산을 좋아하는 이들이 산에 오나보다 ...
뭐 그런 생각들이 상큼한 산바람과 함께 머리를 스치고 갑니다.

이름모를 연초록의 풀꽃들은 어쩌면 그리도 어여쁘기만 한지요.

앞서가는 남자직원은 작고 하얀 들꽃이름을 내게 묻기도 합니다.
뒤에 가던 난 그것은 아마도 아기별꽃이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잘 어울리는 이름인 것 같다며 소담한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주말이면 늘 일에 바쁜 남편, 집안일로 바쁜 나였기에
맘놓고 좋은 봄날 꽃놀이 한번 떠나지 못하고 사는게
지금의 내 현실입니다.

평일날 사무공간을 벗어나서
마음껏 하늘 향해 두팔 벌려 나무들을 안아볼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은 하루입니다.

아...
절로 탄성을 자아내는 한폭의 그림같은 풍경을 뒤로 한채
우린 배경이 되어준 꽃보다 아름다운 이들이 되어보기도 합니다.

그곳에 온 사람들
누구나 시인이었고, 반갑습니다를 외치며 서로 옷깃을 스치는 사람들
모두가 얼굴에 기쁨이 넘쳐 흘렀습니다.

아마도 새로운 사랑이 내게 찾아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는 또 얼마나 맑은지
세망만사 근심따위는 모두 그곳에 씻어내어도 좋을 듯 싶습니다.

힘들게 땀흘리고 난 뒤의 평화로운 한줄기 바람이
내 마음의 휴식을 가져다 줍니다.

미처 생각지도 않았던 마음의 휴식과 고요가 산을 내려오는 내내
나와 함께 걷습니다.
이리 저리 둘러보아도 정말 너무나 아름다운 우리 산천이었습니다.

올라가 보니 이렇게 좋은 산을
힘들다는 이유로 미리부터 겁먹고 엄두도 못내보던 바보같던 시간들이
절로 반성이 됩니다.

그러면서 난 또 무슨일이든 시작도 해 보기전에 두려움을 갖는다는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중에 후회할만한 일인가를 새삼 느껴 봅니다.

내려오는 길에
군데 군데 산취나물도 뜯고, 풀숲을 헤치며 고사리도 꺽었습니다.
손안에 닿는 보송보송한 솜털감촉이 참 향긋하고 좋았습니다.

지리산 멧돼지고기에 취나물, 뽕잎, 상추로 쌈을 싸서
칼칼한 목을 동동주 한잔으로 축여 보니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것이 사람사는 맛이 아닐런지요.

산자락에 어둠이 소리없이 내릴때까지
우린 계곡 물소리 벗삼아 바위틈에 걸처 앉아
간간이 빗방울 떨어지는 커피를 마셨습니다.

들리는 것은 오로지 물소리,
보이는 것은 오로지 고요한 산 뿐인 듯
잠시 현실 세계의 모든것을 잊어볼수 있어서 ...
언제까지라도 그냥 그렇게 있고 싶은 충동이 가슴에 세찬 물살로
일렁입니다.

너무 오랜시간을 지체한 것일까
다시금 식당으로 올라와 보니 이미 일행들은 모두 차에 오른 상태...
몇몇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을 보아하니 우릴 찾고 있었나 봅니다.

이제 그 좋은 시간을 뒤로 하고 집에 가려고 식당에서 베낭을 찾으니보이질 않아
베낭이 없어졌다고 하니 술렁술렁 사람들이 찾아보는 듯 했지만
두대의 버스 어느곳에도 나의 베낭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거나하게 술이 취해 있었고, 아마도 누군가 식당에 남겨져 있던 베낭들을
모조리 쓸어다 차에 실었다고 하였기에
그냥 일단은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 안에는 모처럼 야외엘 가는 아내를 위하여 남편이 잘 다녀오라고 건네준
거금10만원과 카드, 그리고 핸폰, 화장품백 등이 들어 있었지요.

심란한 마음에 등줄기에서 다시 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지만,
애써 참으며 출발을 서두르는 버스에 몸을 싣습니다.

나의 그런 마음에도 아랑곳 없이 우리 과장님은 내게 노래를 시키십니다.
할수 없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릅니다.
앵콜까지 부르라 합니다.
도무지 무슨 정신으로 노래를 했는지 모릅니다.

드디어 첫번째 휴게소 도착 ...
후다닥 정신없이 뛰어내려가 앞에 가는 버스를 샅샅이 뒤집니다.
마치 무슨 검문이라도 나온 양 ...

사람들은 모두 화장실에 갔는지 마침 버스가 텅비어 나는 마음껏 수색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베낭은 보이질 않았습니다.

생각다 못해 의자밑을 훑어 보니 마침내 까만 자락이 조금 보이는듯 해서 끄집어 내 보니
내 베낭이 그곳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누군가 싣는다고 실었는데, 좀전에 마신 술이 다들 올랐는지
기억조차 없는 듯 했습니다.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습니다.

나이가 몇인데 베낭을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하던 나는
졸지에 칠칠맞은 여편네가 된 것만 같았습니다.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스러웠던지 ...
갑자기 오랜 시간 산행후에 오는 피곤함마저 말짱 가셔 버렸습니다.

정신이 퍼뜩 나서 눈만 말똥말똥
대전에 도착할때가지 난 후덥지근한 버스속에서 비내리는 거리만
한없이 바라 보았습니다.
그러다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우리네 인생을 모두 담고 있는 산을 만나고 온 반면에
우연찮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암시까지 ...
참 의미있는 하루였던 것 같습니다.

다시 찾은 베낭속에서 지갑을 열고
휴게실에서 호도과자 몇상자를 샀습니다.
정신없이 허둥지둥 베낭을 찾던 동료들에게 한개씩 나누어 줄 요량으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으로 산행을 마쳤던 것 같습니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다독여 주고 ...
그렇게 오르고, 내리는 길이
바로 우리네 인생이겠지요.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힘들다고 투덜거리며 오르던 산은
이젠 더이상 나에겐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인생을 배우고,
그 속에서 함께 어우러지는 사람들이 있음으로 더욱 빛나고 고운 산이 되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인생일테니까요.

오랜시간이 흘러도 이번 산행은 유난히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내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새롭게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발견한다는 것
그보다 더 기쁜일이 있을까요?

모처럼 아주 값진 마음의 휴식을 얻고 돌아왔습니다.

사십이 다 되어 바라본 산...
그곳엔
미처 알지 못하던 우리의 인생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