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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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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이 툭! 하고 공간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BY allbaro 2001-04-14

당신의 이름이 툭! 하고 공간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TV에서 새로운 기능의 멋진 면도기가 탄생! 하였노라고 세련된
음성으로 외칩니다. 곧 또 다른 무엇인가가 우리의 곁에 왔다고
복음처럼 알립니다. 나는 한번도 TV에 나온 적이 없으므로 아
마 면도기 보다도 덜 중요하고 덜 알려지고 덜 가치 있는 것인지
도 모릅니다. 어쨌든 새로운 그 멋진 면도기는 공장과 판매 책임
자들과 광고 관련인원을 먹여 살리는 눈물겨운 거룩한 밥일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하루에 10초라도 좋으니 당신
의 소식을 알려주는 TV가 있다면…

사랑은 바보를 생산해 버렸고 나는 남루한 연민과 꼬리 긴 그리
움을 대량으로 제조 하였습니다. 그래 놓고 세상살이는 어쩌구
라고 말하려니 제조과정에 아쉬움이 너무나 많습니다. 분명히 봄
인데 가슴 시리기는 눈 많던 지난 겨울 보다도 심하고, 뽀얀 봄
안개를 어지러운 기억들만 난무합니다. 토요일은 언제나 기다려
지던 한 주일의 꽃이었고, 일요일엔 무엇을 할까 함께 눈빛을 반
짝이던 시간들이 이제는 기억조차 아스라 합니다. 나를 떠난 당
신을 따라 가슴 한쪽 늘 푸르던 한 남자도 어디로 가버리고 비어
버린 심장에는 쓸데없는 자괴감이 가득합니다.

웬일인지 내게 무엇이 고이는 것이 싫습니다. 자꾸만 가슴속에
이런저런 것들이 차오르는 것이 어쩌면… 하고 혼잣말을 할 정도
로 싫어집니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늘 책상 위에 호주머니속의
물건을 모두 꺼내어 주욱 정렬하여 놓습니다. 내 속에 있는 무엇
이든 습관처럼 끄집어 내어 가로 세로 줄을 맞추어 놓고 과연 네
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뭐냔 말이야! 하고 무심한 사람처럼 그
리고 남의 일처럼 그렇게 곁눈으로 바라보고 싶습니다. 아마 그
러면 내게 달라 붙어 있는 이 지긋지긋한 상념과 물이 뚝뚝 흐르
는 고독과 늘 가슴 밑바닥을 스멀거리며 기어 다니는, 있지도 않
은 미래에 대한 근심이 다행스럽게도 나 자신의 일 같지 않게 느
껴 질지도 모릅니다.

원래 주문이란 실존하는 대상을 낯설게 만들고, 자신에게 천착한
뭔가를 떨어트리기 위하여 고안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
다. 그래서 돈, 돈, 돈…. 그렇게 자꾸 주문처럼 외면 돈은 영원히
현실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인가요? 나는 무엇이든 잊고 싶은
단어를 다시 웅크린 뇌세포의 구석에서 끌어내어 기억합니다. 그
리고 주문처럼 계속하여 외려고 합니다. 왜냐구요? 당연히 잊기
위해서 입니다. 당신이라고 말을 하고 당신 당신 당신… 그렇게
주문처럼 외워 봅니다. 점점 낯선 단어가 되어 가는 느낌을 스스
로 만족스러워 합니다.

어제 저녁엔 술이 많이 취했나 봅니다.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같은 이야기를 하다가, 수메르인의 점토 판에서 쐐기 문자로 발
견 된 단어 같은 당신의 이름이 툭! 하고 공간에 떨어지고 말았
습니다. 내가 너무 당황해 하자 이야기를 듣던 주변의 사람들도
이마에 당황! 이라고 다같이 새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두 황당하였고, 나는 더욱 참담 속에 오그리고 앉은 나 자신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당신의 이름을, 그 무덤 속의
빛 바랜 부조 벽화를 닮은 당신의 이름을 한 천번 쯤 주문처럼
외워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완전히 낯선 단어로 당신의 이름
이 다시 조립되어지면, 나는 이 봄을 그런대로 그런대로 버티어
낼 수 있을까요? 그래서 가운데 한 글자만 들어도 잉크 방울이
떨어진 것 같이 가슴에 파란 물이 번져가는 당신의 이름이 내게
서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대하며 외우고 외다가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해요. 당신, 아직도…]라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을 지워버리려는 혁명 같은 시도는 어리석은
무위로 끝나고 나는 다시 차오르는 어떤 것을 가슴 밑바닥으로부
터 느낍니다.

당신의 이름은 고독이었고 당신의 이름은 그리움 이었고 당신의
이름은 별이 뭉개질 정도의 폭음이었고, 끈적한 생의 놓아버림이
었고, 갈증 가득한 숙취의 머리 뽀개지는 아침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은 때로 나도 모르게 입가를 삐져 나오는 제기랄~ 이
었습니다.

당신이 선언한 이별로 인하여 내가 얼마나 자연스럽고 철저하게
무너져 내릴 것인지를 당신이 미리 알았더다면, 아무리 맘 독하
게 먹은 당신이라고 하여도, 그래도 그렇게 눈물 많은 당신이 내
게 잊어 달라 소리를 하기가 정말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토요일의 고독은 아마 평생만큼의 고독일꺼야. 도곡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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