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아, 좀 삼가게."
"뭘 말인가?"
"자네는 밤에 창문커튼을 열어놓고 있는데 그래서 나는 지나가다가
자네가 부인하고 키스하는 걸 봤다구."
"허어! 자네 웃기는군. 난 어젯밤에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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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man, don't do that."
"What?"
"You leave your windowshades up at night. When I passed your
house, I saw you kissing your wife."
"Ha! The joke's on you. I wasn't home last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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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
이 유머는 코 큰 서양사람들이 만든 '서양 유머'다. 우리하고는 약간
의 정서와 문화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점을 감안하고 이해하기 바
란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나라도 서양의 남녀, 성 문화와 거의 다를
바가 없으므로 그다지 거부감은 없을 것 같다.
위 유머에서는 남편은 아예 집을 들어오지 않고 있고 부인은 집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 남편이 외박하는데 부인이라고 '맞바람'
피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나. 아주 잘 나가는 '자유부부'들이다.
나는 이 유머를 읽으면서 넉살 좋은 우리의 스타 조영남씨가 부른
'딜라일라'가 퍼뜩 생각이 났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유행했던
노래이니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한 것이다. 흐느적 거리는 우리의 스타
는 예전에도 자기 노래도 아니면서 외국곡을 번안해서 신나게 불러댔
고 나도 역시 신나게 따라부르면서 사춘기의 열정을 발산했다.
"어두운 골목길 그대 창문 앞 지날때
창문에 비치는 희미한 두 그림자
그대 내 여인, 날 두고 누구와 사랑을 속삭이나
오 나의 딜라일라 왜 날 버리는가
피맺힌 이 가슴 달랠 길 없어
복수에 불타는 마음만 가득찼네"
얘기의 시계바늘을 멀리 거꾸로 돌려보자. 그러면 우리 나라 남정네들
겉으로는 온갖 점잖을 다 떨면서 속으로는 온갖 주접을 다 떨고 다녔
다. 아니 속으로도 아니고 버젓이 내놓고 지랄들을 했지.
위로는 왕으로부터 해서 아래로는 시골 촌부까지 여자 좋은 줄은 알아
가지고 후궁을 수백명이나 데리고 살고, 첩을 작은 마누라라고 해서
집에 들여앉히고 살았으니 그 여인네들의 눈에서는 밤마다 얼마나 불
꽃이 튀었을까...
지들은 온 여자를 다 들쑤시고 다니면서 여인네들은 '삼종지도(三從
之道)'니 '칠거지악(七去之惡)'이니 해가며 온갖 족쇄를 만들어 놓고
꼼짝못하게 했다. 나쁜 넘들.
이것이 서서히 무너져 내린 것이 해방과 더불어 서양문화가 밀려들어
오면서이다. 더구나 여성들도 신교육을 받으면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
하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성의 종속물 정도로 여겨지다가
이제는 남성과 대등한 위치로 생각하게 된 것이지.
자유부부하면 떠오르는 것이 정비석씨의 '자유부인'이다. 정비석씨의
소설 '자유부인'은 한국문학 성윤리 논쟁의 시발이었다. 전쟁에 참전
한 외국군인들 에 의한 외래사조의 유입으로 전통적 성윤리관의 혼란
이 극에 달했던 당시 '자유부인'은 54년 1월부터 8월까지 '서울신문'
(대한매일의 전신)에 연재되면서 상류층의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드러
내 사회를 들끓게 했다.
소설은 장교수 부인이 남편의 제자에게서 댄스를 배우고 양품점 주인
남자와 파티에서 춤을 춘뒤 탈선의 나락으로 빠져든다는 내용. 장교수
도 미군부대 타이피스트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불륜의 감정을 갖는 등
교수부부의 애정행각을 다뤄 전통적인 부부관계에 일대 충격을 가했
다.
화제의 '자유부인'에 이어서 1955년 '한국판 카사노바 사건'이라는
'박인수 사건'이 터진다. 대학 재학 중 전쟁 발발로 입대했던 훤칠한
미남 청년 박인수는 해병대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해군장교구락(LCI),
국일관, 낙원장 등 고급댄스 홀을 드나든다. 1954년 제대한 그는 이후
로도 해군 대위를 사칭,인기 댄스홀을 휩쓸며 여성 편력을 펼친다.
박인수가 만난 여성 들은 대학생이 대부분이었으며 고관, 국회의원 등
상류층 가정 출신도 많았다.
검찰은 박을 혼인빙자 간음죄로 기소했지만 정작 이 죄는 친고죄. 박
인수를 고소한 여성은 둘 뿐이었으며, 그나마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두
한 여성은 너댓명밖에 안됐다.
재판에서 박인수는 혼인 빙자 간음 혐의를 부인하며 "내가 만난 여성
중 처녀는 미장원에 다니는 이모(23)씨 한사람 밖에 없었다"고 밝혀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또 "그들과는 결코 결 혼을
약속한 사실이 없었으며 약속할 필요도 없었다…댄스홀에서 함 께 춤
을 춘 후에는 으례 여관으로 가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었으므로 구태
여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빙자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1955년 7월22일. 서울지방법원 법정은 방청객과 기자들로 초만원 을
이루고 있었다.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는 것
을 밝혀두는 바이다." 결혼을 빙자, 1년간 70여명의 미혼 여성을 농락
한 혐의로 기소됐던 박인수(당시 26세)가 혼인빙자 간음죄에 대 해 무
죄선고를 받는 순간이었다. 재판장 권순영판사의 판결문은 그로 부터
47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희대의 명언으로 남아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남녀는 평등을 넘어 '여성상위'의 시대가 되고 있
으며 이혼율 30%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남자만이 바람을 피우던 시대
는 옛날이 되고 말았다. 요즘에는 젊은이들의 성풍속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해방 전에 '자유연애'가 시대를 앞서 가는 새로운 사
고방식이었다면 요즘은 대학가 주변에 동거학생부부는 아무렇지도 않
은 얘기라고 한다. 또 결혼을 거추장스러워하는 성인남녀의 동거부부
도 늘고 있고, 계약결혼도 흔한 일이 되었다.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고 한다. 또 "결혼은 연애
의 무덤"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
이 더 자유로울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결혼한 사
람이 더 자유가 많은 것 같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결혼이 오히려
편하다. 사실 결혼을 하지 않고 여러사람과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며
살 것 같지만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혼도 그렇다. 이제는 이혼이 여자들의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
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본다. 얼마전 신문에도 났던데 우리나라
유명인 중에 단연 이혼을 많이 한 사람은 김지미씨이다. 그 사람은 행
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본다. 물론 남녀간에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경우에야 헤어지는 것도 좋다고 본다. 그러나 노력도 하지 않
고 이혼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인 양 생각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
다.
러시아 속담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라. 바다에 나갈 때는 두번 기도하라. 그리고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 그러니까 결혼생활은 탄환이 빗발치는 전쟁이나 거친
파도와 폭풍우가 몰아치는 항해보다도 더 힘들다는 얘기이다. 결혼 전
에 이 사실을 알면 결혼할 마음이 싹 가실 것이다. 그러나 항상 꽃피
는 춘삼월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가면 어려움이 닥쳤을 때 이혼으
로 해결하려는 우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 노력 없이 되는 일은 없다고 본다. 연애시절에는 그저 빨리
함께 살면 꿈속을 헤맬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환상이다.
그 환상은 빨리 깰 수록 좋은 것이다. 그리고 탑을 쌓듯이 한 층, 한
층 쌓아 올라갈 때 결혼생활의 행복은 이루어진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