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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사랑의 그림자>


BY ps 2001-04-05


어느 한가한 여름날의 오후,
바로 밑의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나야 !'
'응, 왠일이냐 ?'
'내일 점심때 시간있어 ?'
스케줄을 보니 비어있다.
'괜찮은데, 좋은 일 있니 ?'
'응, 뉴욕에서 순이 언니랑 동생 숙이가 왔는데,
오빠 한번 보고싶대. 우리 내일 점심 사줘 !'
'전에 이문동에 같이 살던 순이가 ?'
'응 !'
'남편들은 ?'
'둘다 아직 미혼이래 !'

전화를 끊고, 나는 "타임 머신"을 타고 28 년이란 긴 세월을
순식간에 뛰어 넘었다.

초등학교 다닐때, 경희대학과 외국어대학 사이에
50 여채의 집들이 아담하게 한 동네를 이루고 있었는데,
순이는 바로 옆집에 살고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몇년 살다가, 경희대학교 교수로 오신
아버지를 따라온 순이는 네 공주만 있는 집의 세째였다.

갸름한 얼굴에 유난히 희던 피부,
그리고 서양 인형을 연상시키던 동그란 눈을 갖고있던 순이는,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신비로움과 더불어,
동네 사내녀석들이 다들 좋아하고 있었는데,
특히 나는 바로 옆집에 산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왠지 우쭐해지곤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테레비가 있는 집이
온 동네에 2 - 3 집 밖에 안되어,
우리들의 저녁시간은 별재미가 없었는데,
그래도 가끔 달이 밝을 때는 친구들을 불러내어
술래잡기 (숨박꼭질) 놀이를 하며 놀았었다.
'꼭 꼭 숨어라 ! 머리카락 보인다 !'

어느 달밝은 밤 !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던 중, 숨으려고 어느 비워있던 집 뒤로
돌아갔는데, 그 곳은 벌써 어느 여자애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누군가? 의아해하며, 어둠속에 조심조심 다가갔는데,
가까이 갈수록 순이라는 느낌이 강해졌다.
그 애는 나의 인기척을 느끼고도 가만히 있었는데,
바로 뒤까지 다가선 내가 확인을 하고자 어깨를 돌려 세웠다.

쏟아지는 달빛 속에 드러난 뽀얀 얼굴 !
역시 순이였다.
누군가? 의아해 하며 커졌던 눈이,
나를 알아보고는 안심하면서,
입가에 미소가 잔잔히 퍼지는데,
그 예쁜 모습에 정신을 잃은 나는,
엉겁결에 순이의 조그만 입술을 훔치고 있었다.

놀랜 순이는 두 눈을 감은체 가만히 있었고,
내 가슴속엔 난생 처음 느껴보는
묘한 감정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초등학교 5 학년 짜리가 !
그 옛날, 키스가 뭔지도 모르는 나이에...
달님의 짖꿎은 장난이었던가 ???

그 이후로 순이는 우리들 노는데 끼어들지 않았으며,
몇 달후 우리가 낙원동으로 이사를 하며 소식이 끊겼다.

그리고, 고등학교 2 학년때,
순이네가 뉴욕으로 이민을 간다는 소식을
우연히 전해들은 것을 마지막으로 먼 추억 속으로 잊혀져 갔는데,
그 순이가 나를 만나보잔다고 ?

다음날, 약속한 식당으로 나가면서,
내 머리속은 온갖 질문으로 어지러웠다.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 알아볼수 있을까 ?>
<순이는 나를 알아볼까 ?>
<실망이나 하지 않을까 ?>
<실망을 주지나 않을까 ?>
<무슨 말 부터 해야하나 ?>
<왜, 아직 결혼을 안했을까 ?>
<그날 밤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
<.....
............ ?>


식당에는 벌써 다들 와 있었다.
그러나 '나의 순이'는 그 곳에 없었다.
순이와 닮은 눈을 가진 40 가까이 된 아줌마가 대신 앉아 있었다.
그 '아줌마' 역시,
이 '아저씨'를 길거리에서 만났으면 못알아 볼거라고 했고...

<그래, 너나 나나 30 년 가까이 세파에 부대끼며 살았는데,
옛 모습이 있을리가 없지 !>
<만나서 반가웠다.>
<너 덕분에 좋은 추억 하나 가슴에 안고 살고있지 !>
<언제 또 볼지 모르지만 열심히 잘 살아야지 !>

그렇게, 그렇게, '한 여름의 작은 소동'은 끝나가고 있었다.

그 많던 질문들의 대답을 미룬체,
점심식사하는 사람들의 소음속으로
순이의 그림자는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