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강력범죄와 아동 성범죄자들의 처벌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352

★"잃어버린 20년!!!★


BY 로뎀나무 2002-04-04

★ 오늘도 서울대학 병원을 다녀 왔는데 또 수술을 해야 한다고 김미금 선생이 말씀 하셨습니다 앞전 수술을 한지가 8개월정도 지났는데 봉합 수술을 또 해야 한다니 .. 도대체 이 수술은 언제나 끝이 날런지요 그래도 당신은 그 조금 보는 눈을 유지하기 위해 수술을 하자고 할때 마다 "네 해야지요!" 하면서그렇게 시작 한 수술이 이제11번째 이구려! 이진학 선생님을 만나서 두눈을 다 잃지 않고 한쪽 눈이나마 인공각막을 넣어 희미하게나마 세상을 다시 볼수 있었던 2년전 까지만 해도 당신은 깜깜한 어둠 이셨습니다 왼쪽눈은 이미 적출을 했고 오른쪽 그 한눈에 온 목숨을 걸고 당신과 함께 열심히도 병원을 오갔죠 이렇듯 당신의 그사고 후유증은 2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음에 잊혀질만도 한데 아직도 그때의 사고를 이렇듯 기억나게 하는군요 지금도 남들처럼 편안한 잠한숨 제대로 잘수 없는 모습을 볼때마다 저의 마음이 아려옵니다 약화 후유증으로 눈세포가 궤사를 일으켜 눈물이 나지 않고 그러므로 각종 안질환에 노출되어 결국은 실명할수밖에 없다는 "스티브 죤슨병" 그 원인을 밝힐수없어 연구하던 의사의 이름을 땃다는 "스티브죤슨병 정상인들은 눈속에 조그만 티 라도 들어가면 깔끄럽고 따가워서 눈을 뜰수없는지경인데 당신의 두눈은 눈물이 나오지 않아 30분이 멀다하고 인공 누액을 넣어야 하고세포가 궤사되는 과정에 눈이 땡기고 아프고 머리까지 아픈 이렇듯 불편한 눈으로 당신은 참으로 잘 참으며20년을 견디셨구려! 어느새 당신이 60이라니...정말 세월이 빠른것인지 우리가 병원을 다니면서 세월을 잊고 지내서 빨리 간것인지....... 스티브 죤슨이란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賞이라도 내릴만한 그런 참을성 이죠! 지금부터 이제 그 20년을 회상해 보렵니다 유명 안과를 다 돌아도 고칠수 없는병! 유명 한의원 유명하다는 약을 다써봐도 고처지지 않는병! 이렇듯 이병은 우리의 단란한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었지요 감기를 낫고자 먹은 약이 藥禍事告로 이어져 두눈을 빼앗아 갔던 엄청난 사건! 1981년1월11일 저녁이었어요 감기약을 지어먹고 들어 왔는데 듣지를 않는다며 내일 일을 나가려면 빨리 먹고 낳아야 한다며 저보구 감기약을 더지어 오라던 당신! 가까운 돈미약국에서 알약과 드링크를 사왔으나 먹으나 마나 라며 좀 떨어진 정약국에서 다시 약을 지어 왔읍니다 그러나 그지어온 약을 먹고 1시간도 채 안되어 당신은 온몸에 열꽃이 솟고 온몸이 퉁퉁 붓고 열이 상상할수 없을 만치 오르기 시작했어요 난 겁이나서 그약방을 다시 찾았는데 마침 약국문을 닫으려다 말고 그 약사는 해독제라며 알약 몇알을 주었어요 그러나 오른 열은 점점 더해 갔지요 (지금도 그약사가 조금만 더 노련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새벽에 동네 이재문 내과로 찾아가 선생님을 기다린 끝에 왕진을 부탁 드렸더니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며 재촉을 하셨습니다 가까운 한국병원으로 갔지만 하룻밤새 증세는 온몸에 났던 열꽃이 계란만 하게 부르트기 시작 했습니다 급기야 서울대병원 의사가 오시더니"빨리 저희 병원으로 옮기십시요" 이 증세는 약화부작용에서 오는 증세이고 늦은감은 있지만 최선을 다할테니 가족들은 각오를 해 두십시요 이증세는 취사율이 높은 쪽이니까 기왕이면 모든가족들에게 연락하십시요" !라고 냉정 하기만한 의사 앞에서 난 말을 잊었었지요"선생님 살려만 주세요!"눈물만 줄줄 흘렸어요 약을 지어준 약사와 담당 의사가 전화를 연결했을때 담당 닥터가 한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무슨 약을 그렇게 많이 지어 줍니까?" 청천병력도 유분수지 사흘전만 해도 건강했던 모습이셨는데.. 도무지 의사 말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허둥지둥 병실로 올라간 나에게 "구정전에는 나갈수 있겠지?"뭐!하시던 당신은 그때부터 81병동1인실에서 그 병과의 사투가 시작 되었어요 당신은 3도 화상을 입은 환자처럼 어느한곳 성한곳이 없었어요 입안이나 귀속 까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주사맞을 자리가 없어 간호사들이 전전긍긍 했었답니다 약물화상이 이렇게 무서운건지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은 연신 회의를 하시고 링겔를 하루에 3~4병씩 맞으며 30분이 멀다하고 체온재랴 혈압재랴 소변 받아내기 바세린 거즈붙이기 혈압을 잴때마다 붉은피가 거즈위에 흠뻑 젖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아프다고 소리 지르던 그때의 당신 모습은 목불인견 이었지요 그렇게 똑같은 치료를 반복 하면서 일주일이 지나갔습니다 물론 어떻게 지나갔는지 저두 쓸어지기 일보 직전 이었지요 부어오른 두눈은 그냥 감긴채였고 온몸의 살갗들은 익은 고구마 껍질처럼 만질수가 없었구요 이 모습을 누가 사람이라고 했겠습니까 시골에서 전보를 받고 올라오신 친정어머니는 당신모습을 보고 대성통곡을 하셨고 그때부터 당신에게 좋다는 것은 다 구해다 주시면서 병원으로 날마다 출근 하다시피 하셨어요 그것도 걸어서 오셨어요 지금 생각해도 어머님의 정성은 대단 하셨어요 아는분들의 문병은 끊이질 않았고 다들 혀를 차며 돌아가곤 하였지요 면회사절! 이팻말은 환자가 중환자 임을 일리는 것이었고 면역이 약해 아무나 못들어오는 이름표 같았습니다 당신의 의식도 왔다 갔다 하고 헛소리를 해대고 온살은 문적문적 썩어 냄새가 났으며살갗은 단백질 부족으로 알부민 주사를 맞아대도 하루에 2번씩 시트를 갈아주어도 피와 진물로 흠뻑 젖는 것이었지요! 이렇게 열흘이 지나 갔어요 의사들이 걱정하던 패혈증세가 나타나지 않아 그나마 다행 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감긴 두눈은 뜨질 못하였고.안과 의사 선생님의 협조아래 눈을 면봉으로 벌리고 약을 넣곤 하였는데 그때도 당신은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도 간호사 들은 못들은척 하더군요 매일 이모습을 보면서 눈은 괜찮은 것인지..혹시 화상을 입은것은 아닌지.... 방정맞은 생각을 했었지만 그런대로 한달이 지나가자 조금씩 보인다고 했어요 이제 목숨을 건졌고 병원비가 많이 나오니까 통원 치룔를 하라고 하셔서 500여만원의 치료비를 내고 퇴원을 했습니다 퇴원을 했으나 병상을 집으로 옮긴것 분이었어요 미움을 끓이고 약먹이고 약넣고 목욕시켜주고 환부소독하고 대소변 받아내고 2일에 한번씩 택시잡아 병원가고 그렇게 춥고 기````인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어요 완전한 건강은 아니더라도 차차 회복되어 가리라는 기대를 걸고 열심히 치료를 받았어요 그러나 두눈은 계속 치료한 보람도 없이 계속 찌르고 아프고 눈안에 모래가 든것처럼 깔끄러운 당신을 붙잡고 시내 유명안과를 돌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정확한 병명도 모른체 고개만 갸우뚱 하는 의사들의 한결같은 표정은 우리를 더욱 불안에 떨게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력은 어떻겠습니까? 안타가운 우리 심정과는 달리 "글쎄요~? 치료를 더해봐야 알겠는데요~" 그러던 어느날 공안과 김희철 선생님이 진찰을 끝내고 손을 씻으며 "제 진단이 정확 한지는 모르나 "스티브죤슨 이란 병 같습니다 "그게 무슨 병입니까?"네 약화후유증에서 오는 병인데.....이병은 눈안의 점막이 계속 궤사되어그로인해 눈물이 나오지 않고 그러므로 각막궤양이 계속되고 기타 안질환 계속생겨 안?瑩嗤?결국 실명하고 마는 원인 불명의 난치병 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치료를 포기하면 금방 눈상태가 나빠져서 시력을 빨리 잃을수도 있으니서울대 병원 이진학 선생님을 찾아가 보세요! "라며 편지를 써 주시더군요 겨우 목숨을 건졌는가 싶었는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실명을 할수도 있다니.....실감이 나질 않았어요 병원문을 나서면서 당신의 축 처진 어깨를 붙잡으며 좀더 유명한 의사들을 만나 보자고위로를 해 봤지만 당신은 "난 이제 틀렸나봐 그렇지 않고 눈이 이럴수 있나!" 그때 차라리 죽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하면서 울먹였어요 "그래도 이렇게 산것은 하나님이 살려준 것이므로 힘을 내 봅시다" 라고 말을 하는 나도 눈물이 나와 머리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후 우리는 유명한 안과 선생님들을 차례로 만났어요 김재호 박사님 이상욱 박사님 등등 그러나 결과는 여전히 같았지요 유명 하다는 한의원도 10군데를 돌았구요 기도원에도 가구요 부흥회도 갔어요 이제는 모든것을 포기하고 하나님 한테만 매달리자구도 했어요 그러나 좀체로 차도가 없자 당신이 자꾸만 이세상을 버릴 려고 했어요 자살은 모든것을 잊게 해 주니까요 그러다가 서울대 이진학 선생님을 만나뵙게 되었고 그분은 우리에게 친절하게 "하나님의 기적도 있는법이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고 치료해 봅시다" 라고 위로해 주셨죠 그 말씀은 십만대군을 얻는것 같았고 그후 막연한 기대 속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병원을열심히 오갔습니다 늘 친절하고 자상하신 선생님도 우리부부에겐 위로와 격려가 되었지요 그렇게 일년여가 지나가고 보니 가산도 말이 아니였습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약을 지어준 약사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해 보려구 했어요 종로에 있는 일번지 약국에서 1차 지어먹은 약과 재동에 있었던 정 약국을 찾았지요 그러나 일년이 지나버린 사건이라 그들도 발뺌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사람이 감기약을 지어먹고 그지경에다 실명위기 까지 왔다고 하여도 그들은 절대 자기네 약이 그럴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때서야 병원을 찾아와 보지도 않던 그들이 원망스러웠으며 당신 친구들이 그때 약사들을 고발하라고 했던것을 무시했던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알아 보았으나 명쾌한 답은 없었습니다 그때 대한의사협회 에서도 답변을 주시길"이병은 분명 약화후유증에서 오는병인데 그렇다고 사람을 실험할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하더라구요 1983년 1월29일자 조선일보에도 당신 기사가 났었지요 몇몇분의 도움도 받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의 슬픔과 좌절을 알아주는 사람도 기관도 없었습니다] "나 같은것 살아봐야 당신 짐밖에 더 되겠소 평생 돈을 대야 하고 아이들도 키워야 하는데 당신 차라리 날 죽게 내 버려 둬!" 이렇게 울부짖어 함께울던 밤이 몇번이겠어요 그래도 생명은 질긴 것인가 봅니다 세월은 우리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심히 가더군요 이진학 선생님이 미국으로 유학가셨을때도 난 병원에 가서 주소를 알아다가 편지도 보내고 그곳에서는 고치는 방법이 있을까하고 연락을 보냈지만 선생님은 늘 미안하듯 그 바쁘게 공부하시던 손을 놓고 내게 회답도 주셨습니다 "수술을 하는것은 의사지만 상처를 낫게하는이는 하나님이시고 여기서도 열심히 알아보고 있고 당장뽀족한 수는 없지만 참고 치료 하다보면 좋은날이 올거라며 꼭꼭 답장을 해 주시었어요 얼마나 고마우시던지요 지금 생각해도 큰 위로가 되었었습니다 아이들도 아빠가 매일 아프다고 하니까 기가없이 학교를 다니고 소풍한번 제대로 따라가 보질 못했어요 한번은 윤진이가 유치원에서 자연농원 으로소풍을 갔는데 당신 때문에 ?아가지 못했고 옆에 엄마가 데리고 간다고 하여 보냈더니 남들은 엄마손을 잡고 뛰기도 하고 놀이기구도 타고 하는데 저만 혼자서 잔디밭에서 놀았는데 눈물이 났다며 다시는 혼자서는 안간다던 딸애의 소릴 듣고 난 너무나 속이 상했었답니다 당신은 아마 모르실 께예요 당신한테 매달려 수발들고 직장 다니고 아이들은 늘 뒷전이었지요 그렇게 어린 시절을 어둡게 보낸 우리 두딸들!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려 온답니다 비록 훌륭하게?자라주진 않았으나 그래도 건강하고 착하게 잘 커준 아이들이 고마웠어요 효진이는 한양여대를 나와서 sk텔레컴 기획부에서 일하며 밤에는 대학원을 간다고 방통대4학년 장학금으로 공부하고 있는데 한가지 흠이라면 남자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것과 결혼을 해야 하는데 아직도 부모속을 썩히는 한가지 이유이지요 윤진이는 지금 미국에서 퀸즈칼리지 에서 공부하고 또 학비를 번다고 일주일을 쪼개어 네일아트?렛【?일하고 있다고 하면서 엄마아빠 내걱정 하지 말라고 하는군요 이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인것 같지 않습니까 절망 가운데 있을때 광명시에 계신 오빠 목사님이 교회에 열심히 나갈것을 권유받고우리 부부는 열심히 교회만나갔지요 이제나 저제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구역예베도 잘 나가구요 일요일엔 되도록 주일성수 하구요 이제는 오로지 믿음으로 살수 밖에 없는 현실속에서 두 약사들도 다 용서를 하게 되었고 주님이 우릴 용서 하였듯이......... 이제 마음도 가벼워 ?병芽求?그동안의 겪은 이야기를 쓰자면 한이 없겟지만 되도록 이면 나쁜 기억은 다 버리려고 합니다 지금 부터는 좋은 생각과 아름다운 기억만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 3년전에는 구옥을 헐어 새집을 지어 따뜻한 물이 하루종일 나올수 있어서 당신이 목욕탕 가는것을 힘들어 했던 짐을하나 덜게 되었구요 그나마 확대경을 보면서 신문의 큰글자를 볼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한가지 아쉬운점은 양가 어머님들이 이모습을 보지 못하시고 돌아 가셨다는점이 못내 가슴이 아픕니다 더구나 친정 어머니는 사위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별난 음식만 생겨도 불쌍하다고 백리길을 멀다 않으시고 그음식을 싸 들고 오시곤 하셨지요 성한 사람은 나가서 사먹을수 있지만 마음대로 다닐수 없는 사위가 안타까우셔서 항상 눈물 짓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계시니 당신이 이렇듯 조금씩 볼수있는것을 보셨다면 그 누구보다도 기뻐 하실 어머니신데.. 또 한가지 바램이 있다면 이렇게 당신이 조금 볼수 있을때 아이들도 다 결혼을 시켜야 하는데.....그리하여 아들 같은 사위도 보아야 든든 할텐데요 아직은 그 짐이 남아 있군요 우리에게... 이진학 선생님과 김미금 선생님 덕분에 많은 수술을 거처 오른쪽 눈을 아직은 볼수 있어얼마나 감사 한지요 물론 진행성이라 또 어떤 변화가 올지 아무도 예측하기 어렵지만 이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전 생각해요 이제 당신 60회 생일을 기하여 그동안 알게 모르게우리에게 도움을 주셨던 모든 분께 다시한번 고개 숙여 감시를 드린답니다 당신은 그래도 복 받은 사람 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어요 당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잖아요 이제 당신이 이렇게 볼수 있을때 고향인 부산으로 마산으로 광주로 작은 딸이 있는 미국 까지도 함께 가 보기를 바라면서 이글을 끝맺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