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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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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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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BY 올리비아 2000-10-30

<수필> 나의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에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나셨다.

황주는 사과가 많은 고장이라 바람이 불면, 과수원에서 사과를

한 바구니씩 주워올 수 있는 곳이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어린시절은 기독교가 이북에서 전파되기 시작할 무렵

인 것 같다. 나의 어머니의 학력은 소학교 석달이 전부이다.

소학교에서 배운 한글을 잊지 않으려고 부엌에서 불을 지피면

서 까맣게 그을을 숯 부지깽이로 " 가 갸 거 겨 가에다 ㄱ을 더

하면 각" 을 외우시며 부엌바닥에 글을 써보시곤 하셨다.

당신의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주일마다 주일학교에 열심히 참

석하셨다.

소학교 석달 열흘이 학력의 전부이지만, 모든 세상의 이치를 터

득하셨고, 자녀들과의 대화에도 못 알아듣는 것이 없을 정도로

명석하셨다.

주일학교에서 성경말씀을 열심히 암송하셔서인지 참으로 매사에 지혜로우셨다.

어머니는 일제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꽃다운 십육세에

결혼을 하셨고 이십 전에 이미 딸 하나에 아들하나를 두셨다. 시

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셨다. 막내인 내가 초등3학년이 될 때까

지 무려 삼십년이상 부모님을 모시고 사셨다. 그 당시 어려운 시

절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삼년 동안은 대소변을 받아내셨고 겨

울에는 물웅덩이의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해가며, 극진히 모셔서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네사람들로부터 '효

부효자'라는 칭찬을 들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어린시절에 최대의 고민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한가지
는 '엄마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할까? '라는 고민이고, 다른 한

가지는'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할까' 라는 고민이었다. 내가 어

린 나이에 이런 고민을 하게된 것은 어머니의 나이가 삼십팔세

에 늦둥이로 태어났고 전쟁을 경험하신 이야기를 자주 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어린시절에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유별났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가 안보이면 온 동네를 찾아헤메서 꼭 엄마를 만나야 직성이 풀렸다.
엄마가 안 계시면 허전했고. 시장갈 때는 물론 어디든지 꼭 따

라다녔다. 밤에 잘 때도 꼭 엄마 옆에서 붙어서 잤고 엄마가 혹

시 뒤로 돌아누우시면 섭섭해서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나는 성

장과정이 아주 우수한 편은 아닌데도, 어머니는 나의 좋은 점을

인정하고 칭찬해주셨다. 나를 못마땅해 하시는 말씀을 들은 기억

이 거의 없다. 내가 결혼을 해서 엄마가 되어서 읽게된 책 중에

기억이 나는 것은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이라는 책이다 . 아

이들은 부모가 믿는 만큼 자라준다는 내용이다. 나의 어머니도

나를 믿고 지켜봐 주셨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하

지 않고 취업을 했을 때도, 다시 뒤늦게 주경야독하며 입시공부

할 때도, 이른 아침 출근하여 직장을 다니며, 밤에는 야간대학

에 들어갔을 때에도, 밤늦도록 공부하다가 밤 열한시에 귀가하

는, 몇 년 동안이나 어머니는 버스정거장에 하루도 빠짐없이 마

중을 나오셨다. 내가 대학을 들어갈 무렵 어머니는 이미 환갑의

나이셨지만 막내딸을 위하여 새벽밥을 짓는 일을 멈추지 못하셨

다. 내가 결혼하겠다고 가난한집의 장남을 소개했을 때도 엄마

는 나를 믿어주셨다. 공부하는 남편과 결혼했을 때, 산동네의 단

칸방에서 신접살림을 차렸고, 임신한 몸으로 직장을 다닐 때, 첫

딸을 출산했을 때에도 내 어머니는 내 옆에서 묵묵히 미소로 격

려해주셨고 딸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다..

아이를 낳고, 직장에 다니는 막내딸의 건강을 염려하여, 아기를

돌봐주셨다. 아기를 돌보느라 밤잠을 설칠까봐 외손녀 딸을 손

수 데리고 주무셨다. 밤에 우리 딸이 깨어서 칭얼거릴때마다 아

기를 안고 기도하셨다.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를 할 수 있는 시간

이 마련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냐고 말씀하셨다. 한번은 손녀딸

을 업고 저녁 무렵에 찬거리를 사러 나가시다 계단에서 발을 헛

디뎌서 넘어지셨다. 손녀딸을 다치지 않게 하시려고 하시다 당신

은 이마에 주먹만한 혹이 나왔다. 어머니의 얼굴을 본 순간 나

는 너무 놀랐다. 혹이 갈아않으면서 그 피멍이 눈두덩으로 내려

와 한동안 어머니의 얼굴은 자줏빛이어서 나의 마음을 어둡게 했

다. 노구에 막내딸의 아기를 보시느라 지치셔서 큰 병을 얻으시

기도 했다. 그러나 막내사위가 박사학위를 받고 성공하는 것, 막

내딸이 집을 장만하는 것을 보기를 소원하셨다. 사년후 내가 둘

째 아이를 가졌을 때에 어머니는 손수 보약을 지어오셨고 내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해주셨다. 어머니의 예언대로 아들

을 낳았을 때 어머니는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어머니가 믿고 격

려해주신 만큼, 어머니의 기도덕분에 막내사위가 공부를 마쳤고

좋은 직장을 갖게 되었다. 마침내 우리가 근검절약하여 집을 장

만했을 때에도 정말 기뻐해 주셨다. 모든일마다 '왜 그렇게 했

니?' 라는 말씀한번 안 하시고 딸을 전폭적으로 믿어주신 어머니의 믿음과 격려는 나의 삶에 큰 힘이 되었다.

어머니가 가시는 곳마다 모든 사람들은 어머니를 좋아하셨다.

어머니께서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요, 사람들 사이의 화

해자요, 상담가의 역할을 실천하신 분이다. 내가 존경하는 목회

사역자의 말씀이 기억난다. 성도들 중에서 보면 상당한 지식과

학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많은 인격의 소유자가 있

다. 반면에, 어떤분은 국민학교 학력이 전부인 젊은여성인데 인

간관계나 매사의 일을 처리하고,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경우에

알맞고, 지혜로운지 다른 사람에게 위로와 유익을 끼친다고 한

다. 그 사역자의 감탄을 금치 못하는 말씀을 들으며, 내 어머니

도 그런 분이셨노라고, 생각했다. 빨간줄이 수없이 쳐진 어머니

의 낡은 성경책, 새벽밥을 지을 때마다 부엌바닥에 신문지를 깔

고 앉아 홀로 드리는 수많은 기도들이 어머니의 지혜의 근원이라

고 나는 확신한다. 어머니는 16세에 결혼하여 시부모님을 모시

고, 칠남매를 흠없이 키우셨고,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계신 십년

간 순종적으로 수발을 하여 변함 없는 부부애를 보여주셨다. 나

의 아버지는 팔십까지 수를 누리시다가 소천하신지 삼년이 되었

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매우 허전해하셨다. 북에서

형제자매를 두고 월남하여 친척이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북

에 있는 동생들을 무척이나 보고 싶어하셨다. 내가 사십이 넘은

나이에 뒤늦게 공부하려고 편입하여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때

에 처음으로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 아이들이나

잘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 잘하지 그 나이에 무슨 공부..." 말씀

은 그렇게 하셨지만 어머니가 나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신 것을 믿는다.

올해 일월팔일 토요일저녁이었다. 우리가족은 모두 온천에 가서

목욕을 하고 집에 와서 "아이 개운해"를 외치고 있을 때 전화벨

이 울렸다. 어머니가 온천목욕을 하시고 오는 도중에 교통사고

가 났고, 어머니는 뇌충격으로 현장에서 병원으로 옮기시는 도

중 소천 하셨다. 당신은 생전에 누구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무척

이나 싫어하셨다. 당신의 노후의 삶이 혹시나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봐 어느날 갑자기 죽기를 소원하셨고 기도해오셨다. 깨끗하

게 온천욕을 하시고 맛있는 저녁을 드신 후 어머니 표현을 빌리

자면 "어느날 딸깍 죽어야 할텐데"하신대로 정말 딸깍 돌아가 버

리셨다. 당신의 하실 일을 완벽하게 하시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손수 일을 하셨고 바로 전날까지 교회에 출석하셨다. 일제시대

에 태어나서 만주 땅에서 결혼하셨고, 해방이후 이남으로 내려오

셔서, 육이오 전쟁과 피난살이의 어려움을 겪으신 내 어머니의

삶은 정말 수많은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의 삶

을 글로 써보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당신의 삶의 이야기를 다 들

려 주시지도 않은 채,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버리셨다. 새로운

이천년을 맞이하신지 팔일만에 칠십팔세의 생을 마감하셨다. 돌

아가시면서 까지도 어머니는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하신 것 같다.

당신죽음의 댓가로 칠 남매의 가정에 손자들 학자금을 마련해주

셨다. 막내딸의 마지막 두학기분의 등록금을 내 손에도 남기신

채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다.

어머니가 안 계신 지금도 자연의 섭리는 변함이 없다. 가을은 여

전히 시리도록 아름답다. 낙엽마다의 빛깔 속에 어머니의 사랑

과 격려, 믿음들을 그리움으로 물들여본다. 나의 아이들을 믿어

주리라. 격려하리라. 기도해 주리라 다짐해본다. 나의 어머니가

하셨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