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강력범죄와 아동 성범죄자들의 처벌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393

잃어버린 봄을 찾아서


BY 엔시아 2002-03-21

잃어버린 봄을 찾아서


두터운 겨울코트를 벗은 만큼의 봄을 마음에 담고, 비가 내리는 오후.
수필강의 시간에 맞추어 우산을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우산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소리까지도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는 이유하나로 행복한 마음에 즐거움을 더해주어 콧노래까지 나오게 했다. 날씨에 따라 기분이 좌우되는 내가 우중충하게 비가 내리는 날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니......수업시간이 다 되어가기에 등에 땀이 나도록 강의실을 향해 걷고 있는데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이 있었다. 셀 수 없이 달려있는 붉은 당매자 나무 열매마다, 소나무 잎파리마다, 묵은 나무 가지 끝마다 수정처럼 투명하게 매달려있는 봄비가 만들어놓은 구슬 같은 물방울들......멀리서 볼 때는 안보이더니 가까이 가보니 벌써 파란 새순도 나와있다. 젊은 시절 많았던 꿈은 시나브로 흔적 없이 지워졌지만 한가지 남은 꿈, 차마 버리지 못했던 꿈인 문학수업을 시작한 나를 봄은 나뭇가지마다 영롱한 보석을 걸어놓고 축하를 해주는 것 같아 꿈을 꾸는 듯 행복했다. 우리가 춥다고 움츠리고 있던 시간에 나무들은 봄을 맞을 준비를 끝내고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사계절 중 봄을 가장 좋아한다. 새순이 돋은 연두빛 나무에 역광이 비칠 때의 산을 바라보는걸 좋아해서인지 옷을 사러나가도 봄이면 연두색 옷이 눈에 뜨인다.
봄이면 내가 좋아하는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서 봄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길을 가다가 깨알만한 들꽃이 피어있는게 보여도 가까이 가서 한참을 들여다볼 정도이니까. 산비탈에 있는 밭두렁에 하얗게 핀 싸리꽃을 좋아해서 소녀적 싸리꽃 모양의 머리핀이 예뻐서 사서 꽂았다가 엄마에게 혼난 일도 있다. 시장에서 추운 겨울 동상에 걸려가며 생선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들으면 행복에 겨워 헛소리를 한다고하겠지만 지난 세월동안 남편 자식 뒷바라지하며 그리 행복하지도 그리 불행하지도 않은 삶을 살면서 가슴 한구석은 늘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한 공간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 마음 상태를 계절에 비유하면 가을 아니면 겨울일 것 같다. 내가 봄을 기다리는 것은 봄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계절의 봄이란 의미에다 내 인생의 봄을 꿈꾸며 봄은 나에게 줄 무엇인가 좋은 일을 가지고 함께 와줄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란 싯귀절도 있지만 나를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설계도조차 그리지 못한 체 가족을 위해서 다람쥐쳇바퀴 돌 듯 살아왔다. 오랜 기다림과 그리움 끝에 오는 것들은 모두 반갑고 소중하게 느껴지듯이 내게는 봄이 그랬다.

그러나 기다림에 부풀었던 봄은 꽃을 좋아하면서도 너무 아름다움에 취해서 인지 꽃 속에는 슬픔이 어려있는 듯 보여 어디를 가나 눈에 뜨이는 꽃 때문에 곧 우울함으로 이어진다.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한의 정서가 자리잡고 있다더니 나도 한국인의 피를 이어 받았음일까? 아니면 어릴적 기억 때문일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내가 예닐곱 살 때 봄이었나 보다. 오래 되어서 인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데 아들을 못 낳는다고 할머니께 당하던 시집살이 때문일까? 아니면 무능력한 아버지 때문이었을까? 어느 날, 장에도 한번 안 나가시던 현모양처인 어머니는 갓난아이인 셋째 여동생을 업고 버스 주차장에서 하루에 한두 번 들어오는 버스를 기다리고 계셨다. 어렸을 때부터 당차지 못했던 나는 어머니가 어딜 가느냐고 묻지도, 가지 말라고 어머니의 치마폭에 매달릴 생각도 못하고 봄 햇살이 부서지는 내 키만큼 높은 밭두렁 아래 서서 멀리 서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어머니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과 슬픔에 눈물을 훔치기만 하고 있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그 날 돌아오셨지만 잠시동안의 슬픔이 너무 커서 어린 나의 가슴에 맺혀 있었나보다 . 지금도 그때 눈물 너머로 보이던 엄마의 모습과 가뭄으로 먼지가 풀풀 일 것 같던 길과 눈부신 햇빛과 하얀 제비꽃이 잊혀지지 않는걸 보면.....

어른이 된 지금도 슬픔의 봄은 개나리꽃에서부터 온다. 개나리꽃 컴플렉스인가? 몇해 전 봄에는 어느 집 담장 밖으로 눈부시게 핀 개나리꽃이 너무 화려해 상대적으로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눈부신 봄빛을 마다하고 개나리꽃이 다 질 때까지 집안에 틀어박혀 봄이 가기를 기다리던 때도 있었고, 어느 해는 남편과의 불화로 집을 나와 늦은 밤 개나리꽃이 만발한 길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꽃 위로 쏟아지던 하얀 달빛 때문에 더 슬펐던 기억도 있다. 왜 아름다운 꽃을 보며 우울해지는지 잎보다 먼저 하얀 꽃을 피우는 목련을 보고 있으면 행복보다 먼저 온 불행으로 서러움에 젖어있는 청상의 여인을 보는 것 같아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다. 그렇게 기다리던 봄은 나에게 서글픔과 초라함만을 안겨주는데도 산고를 치른 어머니가 그때가 지나면 잊어버리듯이 나도 마찬가지의 심정으로 이 나이가 되도록 변함 없이 봄을 기다린다. 조바심하지 않아도 겨울은 가고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오는데 봄이 좋은 나는 겨울이 오는 날부터 봄을 기다린다. 마치 내 인생의 봄을 기다리듯이......

누가 말했던가. 인생의 봄은 짧다고......그렇게 말한다면 내 나이는 분명 연두빛 봄도 아니요 , 청녹의 여름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인정하지 않으련다. 꿈을 잃은 삶은 죽음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만 보냈던 시간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나만을 위한 내가 하고싶은 공부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온통 보랏빛 꿈을 꾸는 소녀 같은 심정이다. 언제까지나 가슴속 가득 봄 햇살을 들여놓고 꿈을 심을 자리를 마련해두고 살아갈 것이다.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벅찬 기분으로 맞이하는 올해의 봄은 개나리꽃을 보며 초라해하던 지난날의 봄은 분명 아닌 희망에 넘치는 새봄인 것이다. 망울진 개나리 꽃망울에게 이제는 너를 보며 초라해하지 않겠다고 속삭여주고 봄비가 그치기 전에 가지마다 매달린 보석들을 한 웅큼 따서 빈 가슴 구석마다 뿌려놓아야겠다. 이 봄에는 갑갑하고 어두운 집을 뚫고 나온 봄 나비처럼, 목청 높여 노래하며 봄 하늘을 날아오르는 종달새처럼 움츠렸던 가슴을 펴고 맘껏 날아올라보련다. 잃어버린 내 꿈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