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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자의 일생 -(세번째 이야기) 맴 몸으로 와서 명주 한필을 감고 홀연히 저승으로....


BY 박 라일락 2001-03-28

낮과 밤의 길이가 더도 들도 아닌 절 반이라고 하는
춘분이란 계절이 내일 모래인데도 산에 오를 때 중턱에 있었던 태양은
어느 듯 서산 소나무 가지에 걸린 체 오늘 하루의 마감을 서두르고 있었다.
사람이 화가 나면 배고픔도 모른다더니...
그 사람 앞에서 있는 투정 없는 깡이 다 부리고 나니
속이 후련한 기분에 시장 끼가 느껴오누나.
그리고 보니 어제저녁 한술의 밥을 구경했던가.
사과와 귤.
하나씩 시장 끼를 때웠다.
그리고 나머지 과일은 산 짐승 몫으로 한쪽 구석에 두고,
마른 포만 챙겨서 한 등선 넘어 있는 시동생 묘지로 가서 또 다른 한 상을 차렸다.
"삼촌 나 와 수다. 잘 있었수?
당신 형수인 날 그렇게 힘들게 하더니 설마 아직도 날 미워하고 있진 않겠지요?"
남편의 3살 터울인 바로 밑의 시동생도 남편이 가고 20일 뒤에
교통사고로 홀연히 자기 형 옆으로 묻혔던 것이다.
시동생, 이 형수 보다 5다섯 살이나 위였고.
남편이 살아 있을 때부터 금전관계문제로 엄 첨 우리부부 속을 썩혔다.
툭하면 자기보다 나이 어린 형수를 자기 손아래 여동생 다루듯이 마구 대했으니....
죄 받을 소리로 이 시동생의 죽음 앞에서 우리 친정에서 한 쉼 풀었다고 했던가.
그 사람 보내고 짧은순간 가장 많은 정신적 고통을 준 사람이 바로 이 시동생 이였다.
그런데 죽은 자에게 그 어떤 원한이 남아 있겠는가?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용서되고 사랑해짐을 이를 두고 말함이리라.
내려오는 길목에서 제일 먼저 이 산에 죽음의 호적을 올린
사촌시동생 무덤에 꽃을 꼽아주었고 한잔의 술을 대접하였다.
이미 서산으로 넘어간 태양의 희미한 그림자가 꼬리를 감춘다.
산(山)지기 인부 몇 명이 아직도 열심히 한 묘소를 일구고 있네.
아마도 내일 이산에 입적할 죽은 자가 있는가보다.
또 어떤 중생이 곡기를 끊고 한 많은 生을 포기했는가?
그래도 저승보다는 이 승이 나을 것 같은데.....
가지고 온 건포와 과일, 그리고 남은 술을 현장 일하는 인부들에게 주었다.
고맙다는 과한 인사를 받으면서.
내려오는 길목에서 그 사람에게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한번 더 무덤 위에 눈인사를 주었다.
언제인지는 몰라도 바로 이 옆자리에 내가 누울 것이 아닌가.
이 옆자리를 같이 장만하는 것에 죽은 그 사람을 앞에 두고
친정식구들과 시동생이 참 많은 의견 충돌이 있었지.
아직도 새파랗게 젊은 형수가 이 집안 호적에 있다고 보장 못함이라 했던가?
결국 시아주버니께서 친정식구 편을 들어주셨고 부부묘지를 장만해주었던 것이다.
그 사람.
이 곳에 묻은 3일 후 삼오날,
이 산 전체가 무너지는 여인의 한을 시집식구들에게 내 품었다.

88년도 나라안은 온 통 올림픽 잔치로 들떠 있었는데,
우리의 가족들은 봄의 시작에서 더운 여름 그리고 늦은 가을,
추석 한가위도 병원에서 그 지루한 생활을 했었다.
병명이 똑 부러지게 나타나지 않았기에 머리부터 시작하여 발끝까지
부분 검사를 몇 번이나 했던가.
그런데 위, 간, 폐, 쓸개, 그 아무대도 뚜렷이 나쁜 곳이 없다고 하는데
이 좋은 의료진도 못 밝히니 어찌하란 말인가.
환자는 날로 쇠약해지고 담당의사들은 좀 두고 보자고 하면서
환자를 더 초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이젠 내가 맡아야 했다.
어판장 일을 여자인 내가 그 사람 대리 승인을 받아서 뛰어 들었다.
그래도 남은 식구들의 목구멍이 포도청이기에,
자식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아직도 전부가 어린 학생이니깐...
정말 그 때의 고생은 내 평생 잊지 못할 삶의 무거운 짐이었다.
새벽 입찰을 보기 위해서
병원의 모던 사람들이 휴식의 시간 동트기전에 살며시 나와야 했고,
강구로 오는 버스를 놓칠까 봐 늘 달음박질을 했었다.
내가 강구로 들어오는 그 순간
나의 여식이 방학이라 자기 아버지 병간호를 위해
새벽 버스를 타고 나오니 아마 모녀가 한 선로 위에서 같은 시간대에 교차함이다.
그 해 여름.
얼마나 지루하고 무더웠던가.
아무리 환자를 깨끗이 씻겨도 움직이지 못하니
등에서 난 욕창이 정말 우리 가족들을 힘들게 하였다.
그리고 입원한지 3개월만에 담당의사가 가족 전체를 보기를 원하였다.
아~~~~ 결국 올 것이 왔구나.
미리 짐작은 했지만 난 너무나 두려워서 담당의사를 만나러 가지를 못했다.
그런데 담당의사는 아내가 있는 자리에 말하기를 원했다.
날 보고 그 사람 포기하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란다.
"야! 미친 인간들아. 너희들이 의사라고 곡 타 먹고 있어.
날 보고 뭐라고 했니?
자신 있다고 기다려 보자고 했잖아?
사람 육신 이곳 저곳 다 망쳐놓고 이제 와서 포기하고 집으로 데리고 가라고 해?"
그 날 그 병원은 아마 나의 화가 난 미친 고함소리에
건물 날라 가는 것을 누가 붙잡아 기둥에 묶어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난 왜 그리 쉽게 그 사람을 포기하지 못했을까!
그 사람보다 더 형편없이 아픈 사람이 기적적으로 날아 났기 때문이다.
모던 주위 사람들이 그 사람포기 하기를 권했지만 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너무 큰 고통을 참지 못하는 환자는 알부민으로 하루 하루를 보냈다.
물론 오랜 병원생활에 주사약 거의가 의료 보험 혜택을 받지 못했고,
사비로 구입하였다.
또 그 해 여름엔 알부민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 보다 더 어려웠지.
대구의 여고 동기가 그 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죽음의 그 순간까지 구입해주었다.
그리고 그 사람 입원하여 生과死의 기로에서
큰 집 둘째 질녀가 혼인날을 한 달 뒤로 받았고,
남편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책망했던 나의 동서 큰 형님께서
자기 딸 시집 가기전에 시동생이 죽을까봐 안절부절하였다.
그래. 좋은 것이 좋다고 했지....
여지것도 있었는데 혼사 날을 받아놓고 그 사람 목숨 끊게 할 순 없지..
황금 좀 더 나간다고 금방 우리 집이 망할것이 아니잖아...
그 비싼 알부민이 그 사람 생명을 연장시킨 샘이다.
큰 집 결혼식 날.
모던 친척이 다 모였는데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는 우리 아이들만
큰집에서 오라는 말 한 마디 없었기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아이들한테 울음 섞인 소리로 전화가 왔다.
아니 암이란 병이 전염성인가?
아님 자기들 자식이 축복 받는 날 암에 걸린 삼촌의 자식이 가면 진짜 재수가 없나....
같은 대구의 하늘아래서 많은 음식을 해서 그 호화로운 호텔 잔치를 하면서...
우리 가족에게 이런 식으로 무시할 수 있담!
조카자식에게 피 눈물을 흐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음! 그래 두고 보자.
그 길로부터 나의 좁은 여자의 가슴에 시집에 대한 한을 크게 품게 했다.
대구의 제 일급 호텔에서 한참 호화로운 잔치가 벌어지고 있던 그 순간.
그 사람 집에 가기를 너무나 원했고, 죽음이 눈앞에다가 옴 직감했다.
조카 결혼식 날까지 얼마나 아픈 고통을 잘 참아주었던가.
그리고 결혼식이 끝나는 그 순간.
그 사람 자기 집으로 가는 것이 소원이라면서
자기 침대 밑에 있는 돈 만원을 나에게 주면서 택시를 불러주면 좋겠다고 하네...
아마 죽음이 다쳐옴을 그 사람 자신이 알고 있듯이....
그 사람 마지막으로 나의 가슴에 안겨서 병원 구급차로 우리의 안식처로 돌아왔다.
병 고치러 갈 때 길 양옆에 한 뺌이었던 코스모스는 한 여름 내 내 지고 피더니
그 사람 데리고 들어오는 이 길목엔 코스모스도 제 생명을 다하여 시들고 있었으니...
병원에 입원하고 4개월에서 2일 빠지는 숫자였고.
나역시 병원 새맨트 바닥에서 4일 빠지는 잠자리를 그 사람하고
같이 했었다.
(그 당시 S병원은 보호자 침대가 없었고,외곽 멀리 떨어진 합숙소에서
거취하였음)
아~~~~~~세월아 무심타!.
한 많은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이제 이 사람 내 곁에서 보내야 한단 말인가?

병원차가 도착을 하니 온 동네 분들이 먼저 연락을 받고
우리 집에 너무나 많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래 처 사람들도 마지막 가는 그 사람에게 작별의 인사를 원했고...
알부민 효과 때문인지 죽음바로 앞에서도 그 사람은 고통을 몰라했다.
찾아 온 사람들에게 자기는 다 완쾌되어서 돌아 왔노라고...
이젠 회복만 되면 곧 어판장에 나갈텐데
뭐 땜이 이렇게 많이 찾아 왔지 하고 의문스러워 했었다.
참 기가 막힐 노릇이 벌어지고 있으니....
허지만 모던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웃으면서
"맞아! 이 사람아. 우리 어판장에서 다시 만 날세...."
마지막 고별의 악수인줄 모르는 그 사람...
대구에서 결혼식을 마친 시동생과 사촌형제들이 저녁때 들어 다쳤다.
아마 이 곳 상황을 연락받은 대구의 형제들도 혼이 빠진 잔치를 했으리라.
지네들 형제가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데....
그리고 도저히 내 입으로 그 사람에게 죽음예고를 말하지 못했다.
자기 친동생 즉, 시동생이 자기형에게 죽음이 다가 왔음을 알렸다.
그런데, 그런데.......
그 사람 어쩌면 그렇게 자기 죽음을 아주 침착하게 고스란히 받아들인단 말인가!
주방에 있는 자기 아내를 불러 달라고 하네.
그 당시 난 죽음이란 단어를
그 사람에게 말 할 수 없어서 주방에 숨죽이고 피해있었다.
내 손을 꼭 잡더니..
"보게. 이 사람아.
내 성격이 너무 더러워서 나 어린 자네 고생 많이 시켰네.
그런데 이 자식들 다 우야만 좋노?
자네가 다른 정지 밟지 말고 책임 저 주게"
한 쉼을 쉬고선,
"내 병 고치면 제일 먼저 자 네 승용차 사 주고
옷장 바꾸어 줄려고 했는데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하이"
그리고 죽음의 마지막 길목에서 제일 큰 형님을 학수고대하였다.
아주버니 회사 입찰 건으로 늦어짐에 눈을 깜지 못하고
오전 내내 기다리다가 가까이 다 오고 있다는 연락이 올 즈음.
그 사람 저승 가는 길이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더는 못 기다리고 자기 동생에게 한마디의 유언을 남기고
고통이 없는 하늘나라로 입적했다.
"형님이 왜 이리 아직 안 오시지.
이 동생의 가는 길이 보기 싫다고 하던냐?
동생 자네 이 사람아.
너희 형수 좀 도와줘라. 곱게 자랐는데 날 만나 고생 많이 했다..
그리고 형님에게 전해주렴.
형님은 부자이니깐 조카 공부 좀 책임 져 달라고 전해주렴"
그 사람의 마지막 이 한마디를
자기 형님에게 전해 달라고 동생에게 간곡히 부탁하였고.

맨 몸으로 와서 명주 한 필을 감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한 많은 이 세상 이별하고
저 세상에 누가 기다리고 있는양
바쁜 걸음 재촉하면서 혼자서 길 떠났다. .

(4편으로 연결하겠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봄비가 주룩 주룩 내립니다.
입찰하는 새벽 내내 비가 왔지만 왠지 오늘은 비가 반갑기만 하데요.
산천이 너무 건조해서 사람들의 마음도 산불처럼 활 활 타고 있었나 봐요.
한 여인의 한 맺힌 삶이라고 하면 너무 잔인하게 느껴지겠지요.
그저 그렇게 살아온 한 여자의 일생이라고 생각하고 읽어 주세요.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