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도요아케시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제한하는 조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48

리모콘


BY 솔바람 2001-03-17

남편이 리모콘을 한 번 잡으면 세상이 갑자기 빙글빙글 돌아간다.
요즘 텔레비젼 채널이 좀 많은가.
케이블 방송까지 서른 몇 개의 채널을 마구 잡아 돌리는 남편,
그 많은 채널을 몇 바퀴씩 돌고 나서 잠시 잠깐 채널이 고정됐나 싶어 집중해 볼라치면 옆에서 보고 있는 마누라가 미워서 그러는지 또 돌리기 시작을 한다.
이래서 우리는 가끔 말다툼을 하게 된다.
원래 TV를 잘 안보는 나지만 어쩌다가 열심히 보고 있을 때 채널을 휙휙 잡아 돌리는 남편이 얼마나 미운지 아마도 겪어 본 분들은 알 것이다.
에고, 정말....
사실 결혼전의 내 꿈의 장면은, 남편과 서로 기대앉아서 주말의 명화 같은 것들을 다정하게 같이 보며 공감을 하는 그림에서 늘 머물렀었다.
그런 내 꿈이 결혼생활 15년 동안 거의 한 두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면 이건 정말 누구의 잘못인 걸까.
마누라 TV보는데 채널 돌리는 남자는 간 큰 남자라는 우스갯말은 어디서 나온 건지.
내 남편은 숫제 마누라가 연속극 보는 것조차 싫어서 얼굴 찡그리며 보지 말라고 간섭하거나 삐진 채 침대로 올라가거나 둘 중의 하나다.
마누라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 줄 알기나 하는지....
그래도 자기 여동생이 결혼 전에 연속극 즐기는 건 오히려 불러서까지 보라고 권하더라구.
정말 이쯤 되면 나도 할 말이 무지 많아진다.
늘 TV 보는 사람은 자신이면서 어쩌다 한번 연속극이나 오락프로그램이라도 보는 마누라는 도저히 못 참아내는 이 남자는 리모콘을 서로 차지하려고 후닥닥거리다 안주면 열을 받아서 밖으로 휙 나가 버린다.
뭐, 그럴 땐 속은 좀 불편하지만 잔소리하거나 삐진 채 곁에 있는 것보다는 마음 편하게 볼 수 있긴 하다.
물론 나도 가끔씩은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그 중에 가장 마음이 가는 프로를 볼 적이 있다.
하지만 남편의 리모콘 돌리기는 단순한 프로그램 찾기를 넘어선 가히 중독증상이라 할 만하다.

며칠 전, 갑자기 남편이 리모콘을 찾기 시작했다.
엇다 두고 저렇게 찾아다닌담.
뭐,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은 남편이니까 별로 아쉬울 것 없는 나야 며칠 리모콘 없다고 속 터질 상황은 아니라 내심 코방귀를 뀌며 찾는 척만 했는데 리모콘이 정말로 증발해 버렸는지 며칠 째 집안곳곳을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다.
으으, 열 받은 이 남자가 어제는 갑자기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목욕탕 안에서 양치질을 하다가 무슨 소린가 싶어 문을 열었더니 놀란 아이들이 리모콘 찾는다고 부산을 떨고 있었다.
참 내, 늘 보는 자신이 찾아볼 것이지, 왜 애들은 들볶고 난리야.
애들은 아무 불평 없이 다가가서 지가 보고싶은 프로그램 잘 누르고 오던데.
남편은 2미터만 다가가면 얼마든지 누를 수 있는 그 거리에 무슨 강이라도 흐르는 줄 아는 모양이다. 으이구....
아침마다 꾸무적거리느라 늦어서 학교 태워달라는 아이들에겐 충분히 걸어가고도 남을 거리라고 누누이 강조하면서 자긴 2미터 움직이는 게 귀찮고 싫은 거다.
어이구, 이 한심한 아저씨야....
그치만 드러내놓고 그렇게 말할 수 없는 난, 애꿎은 아이들만 같이 볶아줬다.
도대체 리모콘을 어디다 둔 거야.

리모콘이 없어진 덕에 우리 집은 며칠동안 좀 조용해졌다.
늘 켜져 있던 텔레비젼이 자주 깜깜해져 있었기에.
나야 속이 시원했지만 남편은 아침, 저녁으로 열을 받는 눈치였다.
한 사흘, 채널 바꿀 때마다 툴툴거리며 리모콘 타령하던 남편이 오늘은 결국 11시가 넘어 휙 밖으로 나갔다.
한참 후 들어오는 남편 손에는 노란색의 리모콘이 들려져 있었다.
흐이구, 내 그럴 줄 진작 알았지.

리모콘,
정말 생각해 볼게 많은 녀석이다.
우리 삶에 너무나 편하게 길들여진 리모콘.
이젠 그 리모콘이 없으면 우린 금방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사람이 리모콘을 조종하는 게 아니고, 리모콘이 사람을 주무르는 게 아닐까
우리는 지금 TV뿐만이 아니고 가족도, 일도, 다른 사람까지도 리모콘 같은 것으로 내 맘대로 조종하고 싶은 건 아닌지.
미국에선 요즘 화면을 통해 몇 백 킬로미터 밖에서 일할 수 있는 직장이 늘고 있다고 한다.
집에서 아이랑 함께 있으면서 모니터를 통해서 직장 일을 하는 거다.
글쎄, 어떨까?
교통 트러블도 없고 결근도 없을 테니 너무너무 편해서 오히려 문제일까.
리모콘이 잠시 없으니 불편을 크게 느끼는 우리들...
점점 더 편해지는 세상이 오면 우리들도 자꾸 더 게을러져 자그마한 일에도 불편을 못 참게 될지도 모른다.
멀지 않던 옛날, 우리가 자랄 땐 간단한 소식을 전할 일도 몇 시간을 걸어가서 했는데...
지금처럼 전화가 잠시 불통되어도 큰일 나는 세상이 올 줄 알기나 했을까.
핸드폰은 또 어떤가.
집이나 직장에 오가는 시간을 못 참아서 이젠 모두들 전화를 손에 들고 다니지 않는가.
가만히 앉아서 모든 일을 해결하고 세상을 다 알고 싶은 우리들......
리모콘은 우리들 삶을 대변해주는 애물단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