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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4) -- Los Angeles


BY ps 2002-02-14

오후 늦게 김포를 떠난 비행기는 우리를 싣고 일본 동경으로 향했다.
대한항공이 747 점보기를 들여와 로스앤젤레스로 직항하기 전이라,
일본과 하와이를 거쳐야 하는 여정이었다.

동경에서 5시간 가량 쉬는 동안, 면세점에서 온갖 새로운 상품들로
눈요기를 한 뒤, 우리는 하와이를 향해 출발했다.

가져간 책을 읽기도 하고, 간간이 동생들에게 간단한 영어회화도
가르치고, 지겹게 이어지는 비행기의 엔진소음과 스쳐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졸기도 하다보니 하와이에 곧 도착한다는 기내방송이 나왔다.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지고 있던 태평양의 모습에 지쳐있던 동생들과 나는
곧 미국 땅에 도착한다는 소리에, 번갈아 가며 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하와이 섬이 보이기를 기다렸다.

"아! 보인다, 보여!"
작은 여동생의 탄성에 밖을 내다보니, 저 밑으로 검푸른 단조로움을 깨는
까만 형체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곧 섬이 아닌 큰 배였음이 밝혀져
우리를 웃게 했고, 뒤이어 나타난 진짜 하와이 섬에 커다란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을 했다.

찬바람이 몹시 불던 영하의 김포를 떠난 지 열 몇시간만에 접한
하와이의 따뜻함(섭씨 30도 가량)은 커다란 쇼크였다.
'3월 초에 한 여름 날씨!'
그리고 약간의 습기를 머금은 무역풍에 한가하게 흔들리고 있는
팜트리 (palm tree)의 이국적인 모습을 보니
'우물안 개구리'라는 표현이 실감이 났다.

비록 본토에서 몇천 키로나 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처음 밟은
미국 땅이기에, 이곳에서 우리는 간단한 이민절차를 밟았다.
내 딴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들에겐 한없이 서투르게 들렸을
영어솜씨도 처음 써 보고...
아직 후진국에 속하고 있던 대한민국 출신이라,
폐결핵의 위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들고 갔던
커다란 X-레이 사진을 내밀 땐 약간의 창피함도 느끼면서.....

하와이에서 5 - 6 시간을 보내고 떠난 지 5 시간쯤 됐을까?
드디어 캘리포니아 해안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을 떠난 지
거의 30시간 만 이었다. (요즈음은 약 11시간 걸림)
비행기의 고도가 낮아지면서 잠깐 제법 높은 산들이 보이고, 곧이어
탁 트인 넓은 땅에 L.A.의 장엄한 모습이 펼쳐졌다.
바람이 부는 탓인지, L.A.의 대명사 처럼 알아왔던 스모그마저 없어,
반듯반듯, 질서정연한 시내모습이 뚜렸하게 보였다. 듣던 그대로,
끝이 안 보이는 '바둑판'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공항에 거의 도착할 때 까지 높은 빌딩이 안 보여
의아스러웠는데, 아마 '미국' 하면 뉴욕의 고층 빌딩만 연상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공항에는 일년 만에 뵙는 아버지가 약간 그을은 모습으로 나와 계셨다.
건조하고 햇빛이 많은 사막기후 탓에 검어지셨다 했다.
우리는 그저 형식적인(?) 인사만 했는데, 일년 만에 우리를 보시는
아버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우리를 반가히 맞으셨고,
그것은 한국에서는 볼수 없었던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이기도 했다.

짐을 찾아 주차장으로 간 우리는, 까만 가죽지붕을 한 하얗고 날렵하게
생긴 커다란 차가 우리 차라는 아버지 말씀에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야! 멋있다!"
"무~지 크다!"
"영화배우들이 타는 차 같다!"

큰 문이 양쪽에 하나씩 만 달려있어 신기했던 그 차는(Ford Galaxy 500)
10년이 넘은 중고차였고, 날씨가 조금 쌀쌀하면 가다가 5분 또는
10분 만에 엔진이 꺼지는 형편없는 차 였지만, 어린 우리들에게는
무척 자랑스럽게만 느껴졌다.

공항을 빠져 나와, 고속도로(freeway)를 타고 우리의 새 보금자리로
가는 길에, 우리는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새로운 모습을 가슴에 담기에 바빴다. 단조로운 색상의 차들만 봐왔던 우리에게 온갖 색갈이 다 있는
차들도 새로웠고... 넓직한 길을 질서정연하게 가고 있는 운전자들의
여유로움... 어디를 둘러봐도 '양키'들만 보이던 신기함...
하와이 보다 추울텐데 꽤 많이 보이는 팜트리... 그리고 차안으로
들어오던 따뜻하지만 건조하게 느껴지던 바람의 낯설음.....

약 45분 쯤 북쪽으로 달려, 아버지는 우리를 2층 짜리 목조건물
10여 채가 모여있는 아파트 촌으로 대려가셨다. 무거운 가방을
하나씩 들고, 낑낑대며 계단을 올라가 아파트의 문을 여니,
파란 잔디밭 같은 카펫이 우리를 맞았다.
"야~~!" 탄성이 절로 나왔다.
마루바닥과 장판에만 익숙해 있다가, 영화에서나 보던 카펫이 깔린
곳에서 산다고 하니, 당연히 나온 감탄사였다.

이사하신 지 얼마 안 되어, 시간이 없어 가구를 준비 못하시고,
식탁과 우리들 침대만 덜렁있어 약간은 썰렁했던, 그리고 모든 벽이
벽지가 아닌 하얀 페인트가 칠해져 있어 마치 병원 같다는 느낌을 줬던
그 방 세개 짜리 조그만 아파트에서, 우리의 이민생활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