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한 역장이라면?
기차가 지나고 있어.
영시를 지나 고요해진 대지를 흔들어.
무엇을 하고 있지, 넌?
너에게 달려가는 기차는
"일월의 기차"에서 말하던 검은 뿔을 달고 성이 난
짐승은 아닌 것 같아.
상상이지만 기차를 따라 너에게 달려가는 느낌,
포근하고 안락한 의자에 깃털처럼 얇고 화사하게 앉아 찾아가는,
너는 모르겠지.
넌 기다림과 그리움을 간직한 채 있는 그런 상징이고,
나는 기차를 타고 달리려는 몽상(夢想)에 있다는 것,
한산한 시골 간이역 소나무 아래,
벤치에 걸터앉아
김밥과 보온병에 담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나누는,
상처투성이, 손톱자국이 낭자한 얼굴보다,
또박또박 적어간 편지와,
가운데 손가락에 굳은 살에 남은 눌린 자국을 보며,
추억의 연애 편지를 기억해내며,
손가락에 봄의 포근한 햇살이 스치는 걸
넉넉하게 보아주며, 기뻐하는.
역장으로 나타나면서 이미 팽팽한 끈이 형성되었다는 걸,
혼자만이 느끼는 추억의 여행을 알까.
기차의 육중한 몸체가 스치고 지날 때 느끼는 땅의 울림처럼
가슴의 평온한 물들이 텀벙거리며 요동침을.
서울에서 부산 쪽으로 가는,
내 창문을 흔들며 시간을 태우고, 스치고 있어.
어린 시절 기차는 무서운 상대였고,
혼자 철로를 건너는 건 두려웠어.
좌우를 확인하고 육상선수처럼 주먹을 쥐고,
세차게 두드리는 심장 소리에 귀가 아득해지며 건넜지.
어느 날인가,
앞선 사나이를 뒤따라 건너 안심하고 두서너 발짝 걸었을 때,
독사가 똬리를 틀로, 정지상태로 눈이 마주쳤지.
귀를 두 손으로 막고, 눈을 감은 채 소릴 질렀어.
앞서 걷던 사내의 긴 나뭇가지에
뱀이 대롱이며 멀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기차들이 오갔는지 모르지만,
구름이 해를 탐하며 먹고 있을 때까지, 정신 없었지.
집이 내다뵈는 얕은 언덕 위 철로를 달리는 기차는,
먹이를 노리는 짐승이었어.
항상 비키라고 기적 소리로 생때를 쓰거나,
밀려오면서 자꾸만 몰아내고 있었어.
그의 권력은 대단했고, 누구도 대항 할 수 없었지.
중학교 때일까.
학교가 파하고 집 대문을 들어서는데, 집이 조용했어.
침묵에 발소리도 죽여 현관을 들어섰지.
그 짐승 같은 기차에 옆집 세들어 살던 아들이
누나 따라 논둑 길 뛰놀다 뒤쳐져 얕은 언덕에 올라서
그만 사고를 당했고,
술에 취해 살던 옆집은 결국 이사를 가고,
어디 가서 그 두려운 기차를 등지고 사는지 모를 일이야.
몇 해전 남편과 대학병원 영안실에 갔었어.
쉬쉬하며 말하는 소리.
그분은 기차에 뛰어든 거야.
아들 부부의 자식 없어 서운하고,
미치광이 종교에 며느리가 빠지고,
어디 의지할 곳도 없어, 뛰어들었나봐.
사람들 중엔 사고사인 줄 알고
보상금이 얼마냔 소리가 들리고,
개죽음이니 뭐니 수런거리는 소리만 머릴 흔들었지.
친정 집 문칸방에 살았을 때,
아들 녀석이 태어나 계속 병원에 있게되고
수술 두 번에 계속된 입원에
자꾸만 떠오르던 악몽, 그 아이, 자꾸만 죽은 아이가 맴돌아,
섬뜩했어.
기차의 추억은 어둡기만 해.
영화에 등장하던 간이역,
그나마 아름다운 배경으로 위안의 뿌리를 내렸고,
시에 그려졌던,
톱밥을 던져 넣는 날로와,
손자국이 남아 있는 번들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아,
자식들에게 전해줄 고추며, 마늘 참기름 냄새 풍기는 역사,
인정의 모습들이 다정히 그려지는 그런 곳의 역장이라면 좋겠다.
김동률의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의 뮤직비디오 장면처럼
누군가 추억하며 기다리는 역장도.
천운영 소설집의 철로는
"침묵을 지키던 새벽국도에 화물차 한 대가
오랜 여운을 남기며 사라질 때면
내 귀는 벌써 그를 행해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철로도 넘어서지 못했다.
그에게 가기 위해 철로를 가로지를 수도 없다.
철로는 이 집을 지키고 있는 안전선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방어벽인지도 모른다."
철로의 선도, 오프라인 상의 만남 또한 안전선을 긋고,
방어벽을 설치하고,
그 이상 넘어서면 강한 고압을 흘려 기겁해 도망치게 만들거나,
끝도 없는 지뢰를 설치하여 스스로 지치거나, 자폭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몰라.
역장, 그는 역장이고,
잠시만이라도 포근한 선을 이어 달리고 싶어.
커피와 김밥을 나누진 못하겠지만,
경쾌한 대화는 이어질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