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어릴적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우리 딸은 이다음에 황판사 같은 여판사가 되거라!"
따지기를 잘한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우리나라 최초의 여판사 황판사의 비운의 죽음 이후
아버지가 내게 대한 여판사의 소원은 쏘옥 들어가 버렸다.
그 후에 아버지는
"우리 딸은 이 다음에 행복한 가정주부로서
소설가나 되었으면 좋겠다." 고 하셨다.
술쟁이 아버지가 소설책을 많이 읽는 것이 내겐 몹시도 흥미롭다.
하지만, 그 말씀이 얼마나 소설같은 소리인지를
나는 어렴프시 알게되었다.
딸에대한 아버지의 희망을 누가 정죄하랴?
내가 "우리 이현이(손녀딸)가 훌륭한 외교관이 되었으면..."
이라고 소망한대서 흠잡힐 일이더란 말인가?
살인자의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대통령이 되었으면..."
이라는 희망을 가졌다고 해서 웃음거리가 될 수 있으랴?
내게 글에 대한 천부적 소질이 있어서 걸었던 기대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저 아버지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희망은 실제적인 바람이었을까?
행복한 가정주부가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 있을까?
소설은 깊은 열등감의 산물이라고 알고있다.
소설처럼 살아야 멋진 작품을 만들수 있다면 딸이 소설같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가 있을까?
간접경험이나 깊은 통찰력의 산물로 어차피 허구니까 소설을
창작할 수도 있는 것일까?
최근 소설처럼 슬픈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내가 소설같은 생을
살지 못하고 지극히 평범한 여자로 늙어가고 있음이 못난 상대적
감사의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속물의 행복관이라
나무랄 사람이 있을까?
이야기인즉은 그렇다. 전해 들은 이야기라서 건조하게 정황
설명만 하려고 한다.
둘이는 사랑했고 부모는 수준이 맞지 않는다고 반대해서 헤어졌다.
둘은 마침내 헤어져 각각 다른 인생을 걸었는데 여자는 남매를
남자는 딸 하나를 키우며 살았다.
미국에서 여자가 귀국해서 우연히 두사람은 만났고 사랑은 다시
불붙었다. 여자는 남매를 버린채 남자에게 왔다.
남자의 아내는 돌지난 딸아이를 버리고 '너희들 잘살아라'
더럽다고 달아나버렸다. 그들은 다시 결합했고 기존의 두가정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녀와 10년을 살았다. 그녀는 자궁암으로
남자와 재회한지 10년만에 죽었다.(엊그제...)
남자의 아이를 10년간 키워 12세가 되었다.
이 아이는 엄마가 둘이고 이제 또 다른 엄마를 마지해야 한다.
소설같은 실화이다.
주변사람들이 그들의 장례식에 갔다.
남자는 관속에 여자의 얼굴을 가리지 못하게 했다.
관을 쓰다듬으며 ***아! ****아! 이름을 불러댔다.
41세된 여자의 이름을 소녀이름처럼 불러대는 남자!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저런 사랑 받아보고 죽은 여자는 행복하다" 라고...
소설! 행복한 가정주부가 소설을 쓸 수 있을까?
평범속에서, 아니 속칭 행복이라는 거위가 황금알을 낳을 수
있더란 말인가? 아버지의 희망사항이 내게서 응답되지 않은게
천만 다행인가? 우리모두의 한살이가 소설같지 아니한가?
이보다 더 소설처럼 산다면 비극이 아닌가?
아버지! 나 행복한 소설가는 못되었지만 나름대로 소설처럼 살았어요.
하지만 행복했어요.그러니 글만 안썼지 나 행복한 소설가 아니우?
아버지? 나 아버지 소원 들어드렸어요!
유난히 아버지가 보고싶은 아침입니다.
단숨에 썼는데 말 되는 소린지 무슨 소린지 나도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