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것들 심을 땐 말하면 않되니라. 이빨 빠진 것들이 나오거든"
이른 봄날 밭고랑에 앉은 노인이 나를 만지작거리며 그녀에게 이르던 말이다.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양 바짝 다가앉으며 속삭이는 모습이 못내 웃으웠던지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어느새 그 정 넘치던 말들이 하늘 한켠에 상감이되고 먼 발치 하얀나비 한마리로 떠돌던 봄날의 비밀.
난 자주빛이 고운 때깔로 어린 감나무밭 고랑 사이에 줄줄이 심어졌고 노란이는 콩밭에 하얀이는 고추밭 바깥 둑에 심어졌습니다.
게알같이 보슬보슬한 흙을 가르고 노인과 그녀는 살그머니 나를 떨어뜨린후 가볍게 두드려 덮었습니다.
산빛이 맑아지고 꿈인지 생신지 알 수 없는 고요와 투명이 일순간에 찾아들었다간 사라지는 여름 한 낮, 나의 이야기 주머니도 그렇게 소리없이 자라나고,,,, .
쪼옥 고른 고운 모습으로 태어나기위해 뒤틀림 한번 용납하지 않고 백지장 같은 속속잎과 연녹의 속잎을 겹겹이 두르고 질긴 두루마기를 여민채 고부간의 이야기, 알갱이들을 채워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턴지 알 수 없지만 내 수염과 알갱이 숫자가 똑같다는 소문을 의식하며 그것들 발치마다 공평하게 매다는 일 또한 간단치 않았습니다.
먼저 햇빛을 본 수염끝이 고스라지고 각자의 때깔이 고와지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합니다.
먼 옛날 아니면 지금 어디선가 기찻길 옆에서도 쑥쑥 자라고 여물 나의 종족들과 너나 없이 강원도표를 달고 뻥튀기가 되고 혹은 구워지기도 하고 깡통속에 갇히기도 하고 먼먼 나라에서 팔려오는 이들과 가축의 주식이 되기도하는 종족들을 떠올리며 기다려야 합니다.
노인의 손목과 목소리에 힘이 솟아 - 신토불이 옥쪼시- 로 우쭐대기까진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합니다.
지루한 기다림이 계속될 무렵 그녀는 임신 중이었고
별나고도 변덕스럽다는 입덧이 찾아들었다.
그때 그녀가 찾은 것은 바로 나였다.
그녀의 남편은 망설임 없이 해묵은 처마밑 또다른 나를 가리켰다.
"물에 불려 삶아 먹어봐"
순간 그녀의 얼굴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잊을 수 없을꺼야"
처음 뱉는 독설이었다.
아! 내가 갑자기 물렁물렁 해 지거나 고소하게 팡 터져 오를 수만 있었다면,,,, 대롱대롱 매달려 참수형 당하는 꼴로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집을 빠져나갔다.
하루에 세번밖에 오가지않는 시골 버스를 기다려 읍내로 나갔다.
그리고 두리번거릴 겨를없이 노오란 나를 발견하고 두개를 사들었다.
철이른 나의 등장은 굉장한 기쁨이었고 행복이었다.
말이빨만한 노오란 나를 한알한알 끌어당기는 그녀의 치아끝에 나는 명랑하게 톡톡거리며 터져나갔다.
근처 목장에서 사료용으로 자라난 나였지만 더 없이 행복한 날이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거미줄이 쳐지는 살아있는 대지와 산천!
이제는 일년에 겨우 한두번 그곳을 찾아가는 그녀와 아이들.
-요것들 심을 땐 말하면 않되느니라, 이빨 빠진 것들이 나오거든-
그 정 넘치던 이야기가 흐르는 하늘 아래, 붉고도 푸른 물결 사이 감나무에 콩밭에 고추밭에 파묻힌 노인의 숨은 그림 속 그녀의 눈길이 제일 먼저 내게 머뭅니다.
풋내기 새댁시절 그때처럼 변함없이 나를 반기는 그녀에게 우리들은 다투어 알몸을 보이고도 부끄럼없이 선택되기만 바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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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입니다.
할 일 다한 한 해 살이 내가 잎을 내리고 서있습니다.
이야기 자루 하나 달지 않고 훌훌 벗어던지고 열반에 들었습니다.
강원도가 아니라도 전라도 혹은 충청도 경상도 어디쯤이라도 혹여 벗어내린 나를 보거든 다정한 -다정리- 이정표 쯤으로나 여기고 손흔들어 주세요.
거친 발가락 사이사이 이땅의 황토를 움켜쥐고 그대들의 유년과 추억과 행복을 만들어 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