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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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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82) * 아버지와의 약속 *


BY 쟈스민 2002-01-12

누군가 말했지 ...
돈을 빌려줄 땐 앉아서 주고, 받을 땐 서서 받아야 한다고...

수개월전에 나는 남편 모르게 친정아버지께 얼마간의 돈을 마련해드린 적이 있다.

아버지께서는 그 돈을 빌리는 것이라 하셨다.

부모 자식간에 돈을 빌려주고, 빌려받는 일에 익숙지 못한 나는
그저 필요한 곳이 있다고 하시니 드린 것 뿐이다.

몇달에 걸쳐서 나누어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도 참 이상한 것은 그 일 이후로
내가 안부전화라도 드릴라치면 헹여나 그 돈 어떻게 되었느냐 물어보려 전화한듯
그렇게 생각하실까봐서 맘놓고 전화도 못 드리겠다는 거다.

차라리 그 돈을 그냥 드리는 거였더라면, 그냥 드릴 수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내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을 텐데 ... 싶었다.

몇개월이 지나도 아버지께서 하신 약속은 지켜지질 않았다.

얼마나 힘드시면 그럴까 나의 마음은 점점 더 걱정스러움만 더해갔다.

아들 둘, 딸 셋을 낳아 길러 주셨건만 그 다섯 중 그 누구도
선뜻 친정집의 일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듯 했다.

다들 자기 살기에 바빠서일테지만, 그런 현실이 나를 아프게만 하는 것이었다.

그럴때마다 아버지께선 내게 오셔서 늘 살아가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난 가슴 한구석이 늘 저렸고,
늘 그런 내마음보다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건 보잘것 없는 현실에 머물러 있었다.

10년전의 일이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시댁에서 싸 주신 음식을 바리 바리 들고서 친정이라고 찾아갔을 때도
새엄마는 따뜻한 밥 한그릇 해 줄줄 모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가 갖고 간 음식으로 동네사람들과 한바탕 먹고 놀았다는 이야기는 후에 들었지만 ...

애들 아빤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걸 잊지 못하나 보다.

난 처음부터 그 여자는 아니라고... 영 아닌 사람이어 보인다고...
극구 아버지의 재혼을 반대했던 딸이었기에 ...

그녀의 그런 홀대가 당연한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사위된 사람에게 그건 몹시도 두고 두고 서운한 일일 수도 있겠다고
이해는 되었다.

그 당시의 내 마음이 그렇게 아팠었는데, 그는 오죽했을까...

새엄마가 우리집에 들어오자 난 우연인지 지방 발령을 받게 되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활하면서도 난 몇년 동안 집안 살림에 보태고자 계돈을 보내주곤 했지 ...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 할 때 내게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언제나 마음 넓고, 착하기만 한 큰 딸이어야 했다.

부모가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아도 혼자서 모든 걸 알어서 준비해 시집이란 걸 가야만 할 때도
난 그저 내게 그럴 능력이 주어진 걸 감사했지 원망을 하거나
더 바라는 마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흐른 과거의 시간들이 잊혀져 가고 있는 듯 했지만
가끔씩 생채기처럼 문득 떠오르곤 했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아픔이었고, 그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여 기꺼이
순응하며 살아야 할 내 몫의 짐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여동생이 결혼을 한다고 할 때 아버지께 장농을 마련해 달라고 할꺼라 했다.
나는 그냥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그렇게도 여러해 동안 집안에 보탬이 되어야 했던 딸은
자기가 알아서 하려니 했는지 아무런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사람들에게서
그런 걸 바라다니 ...

너도 참 대단한 아이야 ....
난 그렇게 말했었지 ...

결국 그 아인 그렇게 장농을 마련하여 시집이란 걸 갔다.

어렸을 적 아버지께선 늘 내게 그렇게 말씀하셨던걸 지금도 기억한다.
"네가 하는 만큼 상대방이 하기 마련이라고 ..."

하지만 내가 살아온 날들중엔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왜 나에게는 늘 기대어 오는 사람들만 있는건지 ...

어떨때는 그것이 참 힘들어 멀리 가서 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면...
그 모든 인연의 고리를 끊고 싶어졌다면 ...
나란 사람을 너무도 매정하다고 그들은 내게 그런말을 할 자격이 있는걸까?

지금까지도 아버지께선 오남매 중 나에게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하시곤 한다.

부족하기만 한 큰딸이 그래도 위안이 된다면 난 기꺼이 그리해야겠지...

내가 반대한 새엄마에게 이젠 뭐 별다른 감정의 찌꺼기조차도 남아있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그런 무관심이 더 무서운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내가 하느라고 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것에 대한 응답은 영영 오질 않았다.

그렇게 밖에 살아질 수 없는 게 아버지의 인생이었다면
그런 인생을 바라다 보는 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당신께서 선택하신 인생이셨으니 이젠 후회해도 소용없다고 악다구니를 써야 하는지 ...
내 몰라라 나 살기 바빠야 하는지 ...
하나에서 열까지 일일이 신경쓰며 시시콜콜 나의 영향력 범위에 두어야 하는지 ...

내가 먼저 손 내밀 때도 그녀는 언제나 찬바람 부는 날만 내게 보여주었는데,
옆에 있는 아버지를 봐서라도 나는 언제까지고 손 내미는 사람이어야 하는 걸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항상 좋은인연만 존재하는 게 아닌가보다.

악연도 인연이라면
나는 그것조차 내 나름대로 좋게 해석하며 살아야 할 짐을
태초부터 받고 태어난 걸까?

아버지께서 내게 하신 약속이 지켜질지 난 기다리지 않는다.

그런 약속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존재해서도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르기에 ...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남은 여생을 좀더 편안하게 사셨으면 하는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며, 선택한 인생이었으니
후회는 없었노라고 ...
그런 말을 당신께서 내게 해 주실수만 있다면 ...

아버지께선 내게 한 약속을 지키신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