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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이야기...[21]양장점 시다


BY ns05030414 2002-01-02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무좀이 심해져 우리들을 불러 모으고 말했다.
공평하게 모두 중학교라도 졸업을 시켜야 되니 고등 학교에 다니던 작은 언니보고 학업을 중단하라고…
내가 자원했다.
언니는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난 싫어하는 사람이고, 언니는 장학생이고 난 장학생이 아니니, 내가 그만 두게 해 달라고…
그렇게 되어 서울로 이사하는 작은 집을 따라 서울로 갔다.
양장 기술을 배우러…
작은 집은 가난한 시골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서울로 간다고 하였다.

영등포 시장에 있는 양장점에 시다로 들어갔다.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고 밤 12시가 다 되어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전기 다리미가 드물고 무쇠 다리미를 연탄 불에 달궈 쓰던 시절 연탄불 관리는 내 몫이었다.
작업장에는 연탄 화덕 여섯 개가 있었다.
새벽에 다른 사람보다 일찍 출근해서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켜야 했다.
몇 시간 동안 밀폐되어 있던 출입문을 열면, 밀려 나오는 가스 냄새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숨을 멈추고 들어 가 유리창을 하나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다시 숨을 멈추고 들어가 또 다른 유리창을 열었다.
이렇게 창문 여섯 개를 차례로 열고 밖에서 한참 기다리다 들어가 물을 뿌리고 바닥을 쓸었다.
여전히 연탄 냄새가 났다.
처음 처럼 자극적인 냄새가 아니었지만…
말이 좋아 양장 기술을 배우는 것이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어깨너머로 배울 기회도 많지 않았다.
이런 저런 심부름에 엉덩이 내리고 않을 새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월급 한 푼 주지 않았다.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자리라고…
일 층에 양장점이 있고 오 층 건물 옥상에 작업장이 있었다.
오 층 계단을 수시로 오르내리며 심부름 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실을 사 나르고, 단추를 사 나르고, 천 가장자리 올이 풀리지 않도록 오버루크을 하러 가는 것도 내 일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것 보다 내려가는 것이 힘든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계단을 오르는 일은 다리가 아프면 손으로 짚고 네 발로 기어서라도 오를 수 있었다.
내려 가는 것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한 발 씩 내려 디딜 때 마다 눈물이 절로 났다.
나도 모르게 ‘악!’소리가 나왔다.
너무 힘 들어 하루는 세어 보았다.
도대체 몇 번이나 계단을 오르내리는지…
오르고 내리고를 한 번으로 세어서 50번쯤 되었다.
연탄 가스로 인해 가래와 누런 코가 그치질 않았다.
서 너 달 후 나는 양장 기술 배우길 포기했다.
그래도 학교 다니는 것이 일하는 것 보다 수월한 일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안 된다. 네 아버지 속상할 것이다. 네가 내려가서 언니가 학교 가는데 심술 부리면 집안에 분란이 일어날 것이다.”
시골로 내려가겠다는 내게 작은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고집쟁이였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면 누구의 말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삼 일을 굶고 누웠다.
“저러다 애 죽는 꼴 보겠소. 내려 보냅시다.”
작은 어머니가 작은 아버지를 설득했다.
작은 아버지는 일 주일 후에 내려 가라고 하였다.
몸을 추스른 다음에 내려 가라고…
일 주일 후 작은 어머니가 돈 500원을 주었다.
영등포에서 전주까지 완행 열차 차비가 480원이었다.
전주역에서 우리 마을까지 시내버스 차비는 5원이었다.
기차 안에서는 쫄쫄 굶었다.
아침 일찍 영등포 역에서 기차를 타고 저녁 어스름에 우리 마을에 도착했다.
동구 밖 느티나무를 지나 철길을 넘어서자 우리 집이 보였다.
두 벌 김매기가 끝났을 것으로 보이는 싱그러운 벼들도 보였다.
순간 내 가슴에 무엇인가, 툭, 소리를 내며 터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서울에 살 동안 내 가슴은 답답했던 모양이다.
난 알았다.
내가 무엇인가를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내가 그리워했던 것은 농촌 풍경이었다.
나즈막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 친 곳에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
해질 무렵이면 아이들의 손에 이끌린 소들이 ‘음메~’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곳,
싱싱한 벼들이 자라는 파란 들판이 눈 가득 펼쳐지는 곳.
나는 돌아온 것이 너무 기뻤다.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었다.
후에 살면서 어려움이 닥치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지금보다 어릴 적에 이보다 훨씬 어려운 일도 겪었는데…, 지금 겪는 어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야.’
아버지가 아파서 꼼짝도 못할 동안 뒷간의 변을 통에 담아 거름자리로 옮기는 것은 우리 일이었다.
엄마랑 작은 언니랑 나랑…
그럴 땐 발등에 쏟아지기도 하였다.
그래도 웃을 수 있었다.
그런 일을 해도 고개를 들어 산과 들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면 괜찮았다.
텃밭에 자라는 상추랑 열무랑 오이랑 가지를 바라보며 하는 일은 가슴이 답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