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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자전거


BY 염원정 2001-12-10

 

--아버지와 자전거--

                                        염원정


아버지에게는 멋진 자전거가 한 대 있었는데,
동네 나들이를 하거나 가까운 곳에 볼일이 있을 때마다
윤이 반짝반짝 나도록 자전거를 잘 닦아서 멋진 폼으로
타고 다니셨다.

아버지의 자전거는 일명 \'신사용 자전거\'라고 불렸는데,
\'신사용\' 이라는 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버지의 자전거 타
는 모습은 영국 신사가 말을 타는 것처럼 내게는 멋지게
보였다.

가끔씩 아버지는 나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들길로 가시곤 했는데,
그때 내가 그곳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은 지금도
곱고 아름답게 채색되어 추억이라는 작은 앨범에 담
겨져있다.

작은 머리를 굴려가며 장난도 참 많이 한 내 어린 시절,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양손을 들고
벌을 서야했고,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맞곤 했다.
늘 그렇게 나에게 체벌을 가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엄마였고, 묵묵히 그 체벌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상처 난 마음을 다독거려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두 손을 들고 벌을 받고 나면 나는 뻐근한 팔의 무게만큼
축 늘어져서 대문 밖을 서성이며 아버지를 기다렸고,
종아리에 난 회초리 자국이 아버지 오실 때까지 남아 있기
를 바라면서 나는 늘 애타게 아버지를 기다렸다.

내가 아버지 앞에서 유난히 다리를 절룩거리며 아픈 표정을
지으면, 아버지는 호~~하며 매맞은 곳에 입김을 불어
놓고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러주시고는
자전거 뒷 자석에 방석을 깔아 나를 태우고 들로 데리고
나가 노래를 불러주곤 하였다.

그런데 그 노래란 것이 박자 음정 가락을 완전히 무시한
일명 \'제멋에 부르는 노래\'였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거라~ 우리 순이 나가신다 따르르
르릉~~ 저기 가는 삽살개 너는 보았니? 우리 순이 웃는 모
습 너는 보았니? 나는 너는 보았니?\"

아버지는 일부러 엉터리 가사를 갖다 붙이며 마귀 할머니처
럼 목소리를 지어내며 우울한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를
쓰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한적한 들길에 다
다르면 조금 전과는 다른 아주 짓궂은 폼 (자전거 안장에서
엉덩이를 번쩍 들고 이리저리 씰룩대며 페달 밟는 모습)
으로 마치 개구쟁이 기사처럼 자전거를 탔다.

천천히...조금 더 천천히...조금 세게... 세게...조금 더
세게... 아주 세게.... 더욱 더 세게...
그러다가 다시 천천히.... 이렇게 아주 다양하게 리듬을
약에서 강으로, 강에서 약으로,

아버지가 나를 태우고 이렇게 자전거로 묘기를 부리면,
평소에는 느끼지 못한 짜릿한 쾌감과 흥분에 휩싸여
돛단배를 타고 거센 파도에 흔들리 선원 마냥 어지러워서
나는 나 자신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그렇게 한동안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며
마음 한 구석에 쓸모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잡념들을
하나 둘 씩 허공중천으로 자취도 없이 날려보낼 수 있었고

바람이 머리칼을 잡아채는 야릇한 쾌감에 부끄럼도 모르고
마음껏 소리를 질러대며
오줌을 질금거릴 정도로 미친 듯이 깔깔 웃다가도 하였다.
그렇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서 느낄 수 없는 강하면서도
자상한 모습으로 나의 짓눌려 있던 마음을 펴서 다독인 다
음에, 휘파람을 불며 집을 향해 자전거를 천천히 몰고 갔다
.
한바탕 굿을 하듯 소란을 떨고 난 나는 더 이상 소리를 지
를 기운도 상실한 채 나는 아버지의 커다란 등에 가만히
몸을 기대고 불면 날아갈 듯한 새털 기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아버지의 굵은 허리에 두 팔을 꼭 감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눈을 감고 뜨지 않았다.

그때 내는 아버지의 등을 통해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나오는
따스하고 아늑한 \'심장의 북소리\'였다.

아버지의 심장소리는 아주 강한 비트를 지닌 랩 음악처럼
내 몸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잠을 자려고 베개에 머리를 눕히면 항상 쿵쿵거리며 나
타나서 나를 놀래켰다.

나는 아버지의 등에서 들었던 심장 소리를 아프거나 괴로
울 때마다 만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의미도 모를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쿵쿵거리며 심장 소리는 자장가
처럼 나를 아늑한 꿈나라로 인도해주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가끔씩 아버지의 심장 소리와 만나곤 한다.
아버지의 등에서 들었던 심장소리는 내게 거리낌없이 소리
를 지르게 해 준 믿음이었으며, 나는 그 믿음으로 인해
늘 자유롭게 소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살아오면서,
참기 어려운 어떤 아픔이나, 슬픔, 너무 좋고 행복해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뭐 그런 것들에 의해
너무 힘들고 답답한 나머지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을까마는, 나는 그 때처럼 마음놓고 소리를 지르지 못한
다.
왜냐면,
나는 더 이상 소리를 질러도 좋을 나이가 아닌 것이다.

지금의 나는 아버지가 태워주는 자전거 뒤에 앉아서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대로 소리를 질러도 마냥 예쁘기만 한
어린아이가 아닌 것이다.

나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렸고,
그 때문에, 나는 이런저런 질러야할 소리들을 마음의 관에
가두어놓고 조금씩 기운을 잃고 시들어 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한정된 틀에 스스로 갇혀 그 속에서 지내는 어른인 것이다.

무엇이든 늠름하게 견뎌내야 하는 어른인 것이다.

잘 삭아지지 않는다고 그냥 뱉어버리기 보다는 세월을 약처럼
조금씩 깎아 먹으며 운무처럼 삭혀내어야 하는 어른인 것이다.

아버지의 등에 기댄 채 집으로 돌아오며 눈을 감고 들었던
아버지의 심장소리와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마다 아버지의 허리 근육이 꿈틀대
던 느낌은 지금도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으면 쿵쿵거리며 다
가온다.
마치, 운명처럼...

쿵 . 쿵 . 쿵 . 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