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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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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이야기...[6]아버지


BY ns05030414 2001-12-06

평생을 가난한 농사꾼이었다.
아홉 살 때 부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살았다고 하였다.
할아버지가 우리의 자랑이고 긍지였다면 아버지는 우리의 생명이었다.
아버지는 우리의 생존을 책임진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새벽 세 시, 네 시면 잠에서 깨곤 하였다.
부지런히 일해야 식구들 입에 풀칠할 수 있을 때 생긴 버릇이라고 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단다.
어서 나가 일을 해서 식구들 굶기지 않으려고...
날이 빨리 밝지 않아 일하러 갈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하였다.

중 학교 입학 시험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통사정을 하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공부니까 나를 중 학교에 보내지 말아 달라고...
가난한 동네여서 중 학교를 가는 아이들이 많지 않았다.
여자는 더군다나...
초등학교도 졸업 못하고 남의 집 식모로 가는 아이들이 수두룩 하였다.
못 먹어서 얼굴에 부황이 났다고, 얼굴이 누렇게 퉁퉁 부은 아이들이 흔했던 때다.
끼니를 거르진 않았지만 학비 걱정 없이 학교를 보낼 집안 형편도 아니었다.
그 때 아버지는 나를 앉혀 놓고 이렇게 타일렀다.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생긴 것 같아도 때론 벙어리 귀먹어리 봉사나 다를 바가 없다.
입이 있어 말을 해도 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니 벙어리와 같고, 귀가 있어 듣기는 하나 때론 이해를 못하니 귀먹어리와 같고, 눈이 있어 봐도 이해를 못하니 눈 뜬 장님이라... 내가 배움이 적어서 세상을 이렇게 답답하게 살고 있다.
입 있고 귀 있고 눈 있는 사람이, 말 할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볼 줄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그 때는 그래도 아버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두고 두고 생각이 났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고, 제대로 말하고 듣고 보기 위해 공부를 해야되는 것이라고 말한 아버지가 좋았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어려운 주문을 한 줄 알았지만 그래서 더욱 좋았다.
세상을 살면 살수록 제대로 말하고 듣고 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날마다 제대로 말하고 듣고 보기 위해 노력하며 산다.
그 것을 위해 농사꾼인 아버지가 논 팔고 밭 팔아 가르쳤으니까...
농사꾼 아버지에게 논과 밭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 지를 알기에...

논 팔아 은행에 넣고 그 이자를 받으면 일 년 내내 땀 흘려 농사지은 것보다 많은 소득이 있음을 알고나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런 것을 왜 땀흘려 농사 짓느냐고...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농사꾼이다.
농사꾼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이 네 말 대로 모두 돈만 쫓아간다면 쌀은 어디서 난단 말이냐?"
그래서 아버지에게 배웠다.
세상살이라는 것이 돈만 쫓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신의 편안함만을 쫓아서 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힘들고 고달프고 손해만 보는 일이라도 맡겨진 일이면 해야된다는 것을...

평생 농사꾼으로 땅만 파며 산 아버지를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경한다.
가족을 위해 아홉 살 때 부터 지게 밑으로 들어가야 했다는 아버지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음을 안다.
아버지는 당신의 처지를 벗어나려 발버둥치지 않았다.
주어진 삶이 고달퍼도 그저 묵묵히 견디었다.
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엇다.
그러나 나는 할아버지를 한 송이 화사한 꽃으로 비유한다면 아버지를 듬직한 산에 비유하고 싶다.
언제 찾아가도 그 넉넉한 품에 품어 줄 것 같은...
할아버지는 가족보다 자신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자신이 빛나기 위해 가족의 생계를 모른 척 할 수 있는...
그러나 아버지는 가족이 자신보다 우선이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허름한 옷에 산더미 만한 나뭇짐을 지고 힘들게 사립문을 들어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얀 모시 두루마기 떨쳐 입고 반짝반짝 빛나는 지팡이를 흔들며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아름다웠던 모습도 떠 오른다.
할아버지 보다는 아버지를 닮고 싶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내게 가르쳐 주었다.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자로 잰 사람과 실제 사람은 다른 것임을...
세상 사람들이 나를 측정하는 자가 무엇이건 상관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아버지 처럼 힘 들고 고달프고 빛이 나지 않는 길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