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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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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아저씨와 소녀


BY 목련 2001-11-20

아이가 두돌이 다되고 내 나이 설흔, 낮설지만 그게 지금의 나의 모습입니다.
간혹가다 생각나면 통화하는 이가 몇있고, 직장이라는 테두리에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던 나에게 여고시절 친오빠처럼 편지를 주고 받던 그 군인아저씨가 갑자기 궁금해진건 오빠의 사촌동생인 선배언니로부터 오빠가 나의 안부를 묻더라는 얘기를 들은뒤부터 였습니다.
13년의 세월동안 생각해내지 못한 그 군인아저씨. 정말 성실하고 외모도 근사했던 아저씨. 선배언니한테 전화번호는 받아놨는데, 우두거니 번호만 들여다보고 한참이나 옛날 생각을 했습니다.
한번쯤 그 아저씨의 목소리라도 듣고 그간에 안부를 묻고 싶었습니다. 여고시절 부모님이 안계셨던 오빠는 군복무중이었는데 친동생처럼 살뜰하게 편지로 안부를 묻고 공부하는데 많은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상 편지를 주고받던중에 어느때부터인지 아저씨의 편지속엔 연정이 묻어 나는 글귀들이 눈에 띄었었죠. 여고 졸업반이던 나는 정말 순진했는지 겁이나서 편지와 연락을 끊어버렸죠.하여튼 그 뒤로 아저씨는 제대를 하고 저를 찾아도 왔던것 같은데 그때마다 번번히 어긋나버려서 얼굴한번 못보고 이렇게 긴 세월이 흘러버렸네요.
아마 그때 계속해서 연락이 되었더라면 지금쯤 아저씨와 결혼해서 함께 살았을지도 모르겠죠.
지금의 자상하고 성실한 남편에게 쬐끔은 미안한 맘을 갖고서 드디어 통화를 시도했습니다.
기계음으로 그간의 세월을 건너서 전화를 하는게 약간 어색하더군요. 예전의 목소리가 어떠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으면서 목소리가 많이 달라졌다고 했어요. 첨엔 할말이 없대요. 아저씨도 당황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저씨는 사내커플로 결혼해서 아이가 셋이라고 합니다. 제가 너무 많다고 놀래하니까 둘은 더 낳아야 한다고 징그럽게 받아칩니다.그리고 지금하는 일도 참 잘된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기반이 잡아지면 시골에 정착해서 농사짓고 싶다고도 했지요. 그래요 아저씨는 도시체질은아닙니다. 아기를 맡기고 직장생활하는 내게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하는 데 하며 걱정어린 말도 합니다. 나중에 선배언니랑 꼭 놀러오라더군요.
행복하시냐는 내 물음에 서로 싸움안하고 애키우며 남들처럼 살면 행복한거 아니냐고 진짜 아저씨 같이 말하대요. 순간 보통사람들처럼 변한 모습이 너무 푸근하게 느껴집니다. 아무리 목소리를 차분히 하려해도 내 목소리는 철딱서니 없는 아이같아 집니다. 전화하기전 거리감은 어느새 사라져 농담도 하고 아저씨도 간간히 웃습니다. 설흔중반을 넘긴 아저씨와 설흔인 나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고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잘되시길 바란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습니다.
정말 인생을 살면서 다시한번 가보고 싶은 시간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런시간이 떠오르네요. 저에겐 여고시절 학교가 파한후 집에오면 주인 아주머니가 전해주던 오빠의 편지를 받아보던 그 시절이 참 그립습니다. 그때만큼 한 남자로부터 집중적인 편지를 받아본적이 없지 싶네요. 이시대 최고의 낭만파라고 큰소리 치는 남편도 연중행사입니다. 그 수많은 편지를 지금은 다 없앴지만 왜 없앴는지 안타깝네요. 오빠도 저를 그렇게 여고생의 청순한 모습으로 기억하셨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전화하길 잘한것 같애요. 궁금해하기만 하고 평생을 그렇게 살수도 있을텐데 전 성격상 그게 좀 안돼거든요. 하여튼 힘든 숙제 푼 아이처럼 속이 후련해요. 오빠처럼 저도 더 열심히 살아야 겠어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아이데리고 부부동반으로 저녁이라도 함께할 날을 기다려 봅니다.아컴님들 행복한 하루 되세요.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