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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년은 고아원에서


BY 이젠 아침이가 2001-01-28

지금으로부터 35여년전...
난 00 고아원에서 자랐다.
여러가지 남들이 겪지 못한 일들이 많지만...
오늘 아침 우연히 이방 에세이 쓰신분들의 글을 읽고 용기가 나서
글쓰는 재주라곤 없는 내가 떨리는 맘으로 독수리탓법으로 내유년을
떠올려 본다.
그러니깐 60년대...
그땐 모두가 먹거리가 힘들었고 생활고가 힘들어 우리원에 식구들도 하루 한끼가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할때가 많았다.
(너무 많은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바람에 무슨얘기를 먼저 쓸까 정리가 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힘든 나라살림에 나라에 보조가 모자라 미국원조가 많았다.
각 사람개인마다 미국사람 한사람씩 보호자를 정해서 선물이며 편지며 용돈이 조금씩 동봉되기도 한때 였다.
일찍이 미국사람들을 동경하며 그들에게 감사하며 생활했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부모보다, 더 생각하며 그분들에게 희망을 품기 까지 했으니....
국내에선 미군부대와 결연이 맺어져서...
군복무하시며 휴일날은 우리 고아원을 방문하시는 고유 맨버들이 계셨다.
우리어린이들과 놀아 주고 웃겨 주고...
우린 주일날만 기다렸다.
그들에게서 많은 위로가 되었고 즐거운 따뜻한 시간들을 가질수 있었으므로....
하지만 미국사람들은 무척 개인적인 성향이 짙은것 같다.
누구를 좋아하면 꼭 그 어린이를 지목해서 일방적으로 한아이만 찾는 경향이 있었다.
선택되지 않은 아이의 슬픔과 비애를 난 잘몰랐었다.
어려서 난 예쁘지도 피부가 햐얗게 귀엽지도 않은 뚱보에 지금도 본바탕이 어딜가려나 외모엔 영 자신이 없다.
평범에서도 뒤지는 나에게도 선택을 해 주시는 미군병사가 계셨다.
그분도 뚱뚱한 체격에 못생긴 얼굴인걸 기억한다.
덕분에 일요일이면 난 공주로 둔갑할수 있는 기회가 주어 졌다.
그큰 키에 무등을 태워 온거리를 활보하며 다니고 조금씩 사주시는과자는 먼저 받을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집앞 유원지에 큰배를 탈때도 선택되어 친구보다 먼저 배에 탈수 있었고...
언제나 옆 자리앉혀주어 든든한 빽이 되어 행복을 맛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유없이 보모선생님께서 불리어 갔더니.
횟초리로 종아리를 터지게 맞았다.
미군사람을 독차지 한다는 이유로....
난 선택의 권한이 없었다.
선택되어 지는 상황이었고....
그분들은 일요일이면 군용차로 5~10명 오셔서 우리들과 어울려 눈높이를 같이 해서 놀아 주셨기에....
자연스레 친구들도 그분이 오시면 나를 찾아 그분에게 데리고 갔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보모선생님때문에 많이도 울었다
억울함에...참고...
숨어서 그분을 지켜 볼뿐이었다.
그당시 난초등학교 들어가기전인것 같다.
작은 몸으로 숨어봐야 그분에게 틀키게 마련....
온집을 헤메며 찾아 난 잡히지 않으려 그넓은 아랫집 윗집을 헤메며 도망을 쳤다.
보모선생님께 혼날까봐.
뛰어 도망가다가 내리막이 일층건물높이정도에서 뛰어 내렸다.
지금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만큼 적실했다.
그분은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나를 경이롭게 생각하고 놀람과 이유를 통역인에게 물었다.
난 싫어 졌다고 만 말했다.
그분은 몇번이고 물었다.
난 후회스런 말을 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분은 그후로는 우리원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
아마 재대해서 본국으로 가셨겠지....
한국에 어린이에 대해 배신감을 안고.....
지금도 생각하면 미안한 맘에
"잘못했었다고
본심이 아니 였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리며 숨어서 찾았는지...."
전할수만 있다면 이렇게 외롭지는 않을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