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아들 넷, 딸 하나인 집의 맏이다.
시어머니는 위로 아들 셋에 네 번 째로 딸 낳고 섭섭했다는 사람이다.
하나 뿐인 고명 딸 시누는 혼자서 집안 심부름 다 하느라고 학교 숙제도 할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남편은 부엌에 차려진 밥상도 들어다 먹으면 남자 체면이 손상된다고 생각하고 자랐다.
남편을 포함한 시집 식구들이 말을 시작할 때 자주 쓰는 말 중의 하나는 "여자가..."이다.
여편은 위로 딸 셋, 아래로 아들 하나인 집의 셋째 딸이다.
친정어머니 늙어서 간신히 얻은 외아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음은 당연지사다.
세째 딸의 그에 대한 시기와 질투 또한 대단해서 친정집은 다른 집과는 다른 문화가 형성 되었다.
"여자가..."하는 말은 친정집에서는 금기 사항이다.
적어도 셋째 딸인 여편은 그런말 듣기를 거부했고, 듣지 않고 자랐다.
그런 남편과 여편이 한 집에서 공동 생활을 시작했다.
의견의 불일치가 종종 일어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남편과 여편이 첫 아이를 갖게 되었다.
남편은 그 아이가 아들이기를 원했다.
여편은 그런 생각은 뱃 속에 있는 아이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했다.
뱃 속의 아이가 아들이기를 바라다가 딸이면 실망할 것이고, 그 것은 아이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남편은 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 했다.
여편의 배에 귀를 기울이고 말했다.
"임마, 꼭 하나 달고 나와!"
그럴 때 마다 여편은 속이 상했다.
뱃 속의 아이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어떤 바램도 없는 순수함으로 첫 아이를 맞이하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의 집요한 아들 타령는 여편마저 한 편으로 기울게 하였다.
남편이 여편의 배에 귀를 기울이고 아이와 대화를 시작하면 여편은 말했다.
"딸이야, 내 뱃 속에 있는 아이니까 내가 더 잘 알지."
알긴 어떻게 아느냐는 남편의 반문에 이렇게 말했다.
"난 꿈을 꾸어도 딸 꿈만 꾼단 말이야."
사실은 여편은 꿈 같은 것은 잘 꾸지도 않는다.
남들은 태몽이 이렇쿵, 저렇쿵 하지만 여편은 그런 말엔 콧 방귀도 뀌지 않는다.
여편은 그저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길 바랄 뿐이다.
눈이 많이 내린 어느 날 남편은 커다란 보퉁이를 안고 돌아왔다.
무엇이냐고 하니 출산 준비물이란다.
직장에 다니는 여편이 바쁘고 힘들 것 같아 남편이 외숙모와 같이 샀다고 했다.
여편은 스스로 준비하는 기쁨을 빼앗긴 것이 조금 섭섭하긴 해도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그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보퉁이를 끌어 당겨 풀어본 여편은 깜짝 놀랐다.
모두 분홍 일색이었던 것이다.
"여보, 왜 모두 분홍으로만 산 거죠?"
"당신이 딸이라고 했잖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난 단지 자기가 지나치게 아들 타령을 하니까 해 본 소리일 뿐인데......."
"난 당신이 꿈도 그렇다고 해서...."
이래서 여편과 남편의 첫 아들은 분홍 이불과 요 속에서 자랐다.
"분홍이면 어떠랴, 오히려 잘 됐지.
아들아, 아들아,
너는 이 세상의 수 많은 편견과 벗하지 말아라.
아들아, 아들아,
엄마가 깨뜨릴 수 없는 수 많은 편견들 ,
너에게 대 물림하고 싶지 않은 수 많은 편견들,
세상에 있더라도 ,
너는 그 것과 벗하지 말아라."
여편은 분홍 이불 속의 아들을 토닥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