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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당신이 한 푼도 안 줘도 괜찮아.


BY ns05030414 2001-10-19

여편의 남 동생이 결혼을 한다고 한다.
친정 형편을 잘 아는 여편은 도와 주고 싶다.
남편의 욕심을 아는 지라 말 꺼내기가 어렵다.
그래도 일단 말은 해야지.
"여보, 동생이 결혼 날짜 정했다고 연락 했어."
"그래, 언제?"
"얼마 안 남았는데 큰 언니도 이사한 후라 형편이 어렵다고 하고, 작은 언니는 자기 공부하기도 빠듯하고..."
남편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진다.
"왜? 얼마나 도와 주고 싶은데?"
생각하는 액수를 입 밖에 꺼내면 남편이 놀랄까봐 여편은 이렇게 말 한다.
"다다익선이지 뭐."
"백 만원 쯤 하면 되겠어?"
성미 급한 남편이 먼저 액수를 제시한다.
여편이 생각하고 있던 액수의 두 배다.
그렇게 많은 액수를 제시하면 여편이 물러 설 줄 알고 선수를 친 모양이다.
물러 설 여편이 아니다.
"응! 그렇게 하기만 하면 좋지."
"안돼!"
액수를 자기가 먼저 제시해 놓고 남편은 단호하게 안된다고 한다.
"왜 안되는거야?"
여편은 일부러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반문한다.
"당신 동생들 학비는 몇 년 째 꼬박 꼬박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우리가 대고 있잖아. 당신이 알다시피 내가 그 것에 대해 불평 한 마디라도 한 적 있어?"
"학비는 투자이지만 결혼식에 들어가는 돈은 낭비니까 안돼."
"뭐라고?"
여편은 기가 막힌다.

함께 살고 있는 시할머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소리 죽여 가면 삼일 밤을 설득해 보았지만 남편은 요지부동이다.

여편은 눈물이 난다.
부모가 자기를 어떻게 키우고 가르쳤는지를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막내 딸이라 여편이 철 들 무렵 부모는 늙어 있었다.
논 몇 뙈기 짓는 것으로 학비는 턱 없이 부족했다.
학비에 보태기 위해 시 오리를 걸어 시장에 푸성귀를 내다 파느라고, 무거운 광우리 무게에 눌려 어머니 정수리에는 머리카락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칠 팔월 땡볕에 아스팔트 열기를 들이 쉬고 내 쉬며, 일원하는 냉차 한 그릇 돈 아까워 못 사 마시고, 어머니는 오후 내내 푸성귀를 팔았다.
늙은 아버지의 갈퀴 같은 손도 떠올랐다.
손톱 밑이 벌어져 피가 보이던 어머니의 손도 떠올랐다.
학비를 위해 팔려야 했던 논도, 밭도, 떠올랐다.
남편에게 정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자기 부모 돕자고 할 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기쁘고 대견스럽기 까지 했는데......., 사랑이 뭘까? 이 사람은 정말 날 사랑하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 끝에 문득 여편의 머리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여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맞다. 그 것이면 된다."
남편의 성화에 마지 못해 들었던 재형저축이 생각났다.
그 땐 그저 남편의 성화에 형식적으로 적은 액수인 삼 만 원 짜리를 들었었는데 그 것이 어느 덧 삼년이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 것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해약하면 손해 본다고 하지만 그까짓 손해가 대수랴 싶다.
재형저축을 들라고 성화를 부렸던 남편이 고마워 여편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한다.
"여보, 됐어. 당신이 한 푼도 안 줘도 괜찮아."
여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의아한 남편이 묻는다.
"정말? 어떻게 할 건데?"
여편의 목소리는 밝다.
한 옥타브 높아져 있다.
"삼 년 짜리 재형저축 만기가 가까워졌어. 해약하면 돼. 그 것은 내 돈이거든. 당신이 상관할 수 없는 내 돈이라구. 내가 직장 다니면서 부은 거잖아. 염려하지 말고 푹 자. 나도 참 바보다. 삼 일 동안 당신과 싸우면서 그 생각이 왜 이제야 나는 거지? 여보, 고마워. 내가 싫다는 데도 그 것 부으라고 성화를 해 줘서."

그 다음 날 남편은 백 만 원을 넣은 봉투를 여편에게 주었다.
"그 재형저축 해약 하지마."

울 남편 욕심부리다 돈이 두 배로 들었다는 깨소금 같은 이야기.
남편과의 싸움에서 내가 울린 첫 번 째 승전고이기도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