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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 아래서...


BY 들꽃편지 2001-01-16

일산 신도시로 이사 올 때는 초겨울이였다.
작은 방만한 아파트 화단엔 삐쩍 마른 나무만 몇그루 보였던 겨울.
여기는 북쪽이라 봄이 더디게 온다.
서울 남산엔 개나리가 폈다는 소식이 있어도 이 곳 개나리는
고집스럽게 긴 가지만 출렁거리며"난 몰라요."한다.
일층 현관을 나서면 바로 화단인데 양쪽으로 키가 큰 나무 두 그루가
어느날 가지마다 하얗게 티밥처럼 눈꽃이 보이더니,며칠뒤엔 아주
연한 분홍색으로 일제히 "와아~~"하며 꽃이 피기 시작했다.
아파트 현관 입구마다 두 그루씩 똑같은 꽃이 피었다.
뭔 꽃인가 알고 싶었다.
그 나무중에 한 나무가 '살구나무'라고 쓰여진 명찰을 달고 있었다.
"오호,네 이름이 살구였구나"
우리 마을에 제일 많은 나무가 살구나무였다.
앞구석 뒷구석에서 살구꽃이 화사하게 입주를 축하하며 날 향해
피어난듯 했다.
난 이 꽃이 좋아 애기를 데리고(지금은 초등학생인 막내)꽃 그늘아래
서서 하늘쪽을 올려다 보며 말귀도 못 알아 듣는 애기에게
"살구꽃 참 이쁘지?정말 예쁘다."했었다.
4월은 모질게 짧았다.
후다닥 도망가듯 5월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다.
그러면 살구꽃은 또 일제히"우와~~~~"하며 떨어졌다.
온 화단이 싸래기눈처럼 살구꽃이 얇게 쌓였다.
그때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 다음날이면 경비아저씨가 하루 종일
꽃잎하고 니가 이길래 내가 이길래 하며 신경전을 벌이셨다.
레스링하듯...허리를 잡고 돌리려고 하면 두손 두발을 목숨처럼 바닥
에 딱 붙어 버티듯....
5월이 가면 살구꽃이 핀자리에 열매가 달렸다.
동전만한 열매가 꽃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장마가 왔다가면 그것도 "우다다닥~~"떨어져 화단안이 온통 살구열매
투성이였다.
난 그걸 보면서 농사짓는 농부마음이 되어 아까웠었다.
여름이 끝날즈음에 살구열매가 노오란빛으로 부끄럽게 익었다.
그러면 아이들이 "이야~~"하고 달려 들어 열매를 딴다고 나무밑에서
휘이적거렸다.
나도 따서 한입 물었더니 시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너무 이르게 딴 것 같았다.
조금 더 두고 봐서 주황빛이 완연할 때 따야하는건데...
계절은 다시 가을로 치닫고,무성하던 초록은 단풍물이 얼룩얼룩
들었다.
겨울엔 또 다른 변신을 하면서 실구나무는 여전히 삐쭉하니 서
있었다.

살구나무 아래서 편지를 기다렸던 아름다운 날이 있었다.
꽃잎이 날리면 그 밑에 서서 우체부 아저씨를 설레임으로 기다렸었다
바람이 부는대로 내 마음도 멀리로 떠나고 싶었다.
바람따라...님따라...휘적휘적 날아 보고 싶었다.
낙엽되어 떨어지는 가을엔...'가을 편지1,2,3...'이라는 제목으로
매일매일 엽서가 가랑잎되어 내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
살구나무 그늘 아래서 그 엽서를 읽고 또 읽었다.
엽서따라...그리움따라...무작정 기차를 타고 싶었다.
이젠 편지를 기다리던 그 봄도,
가을 엽서를 읽었던 그 계절도 없어졌다. 떠나버렸다.
다시는 돌아 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버렸다.
지금은 겨울이다.
눈이 많이 쏟아졌다.
기온도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살구나무가 서 있는 마을이 꽁꽁 들러 붙었다.
내 마음처럼...그대 마음처럼...
봄이 되면 살구나무에 거짓말처럼 꽃이 피겠지.
어김없이 꽃잎이 날리고...
그러나 사랑은 다시 피지 않을 것이다.그리움도 날리지 않고...
올 봄엔 살구나무 아래서 무얼할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