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임시공휴일 어느 날이 낫다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57

된장


BY my꽃뜨락 2001-10-11



뚝배기에 된장 풀어서, 멸치도 몇마리 집어넣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두부 반모, 애호박 서너조각, 풋고추와 대파
한웅큼 슬쩍 뿌리면 우리 아이들 좋아하는 된장찌개가 순
식간에 마련된다.


저녁메뉴 고민하다 이거닷! 무릎을 치고 된장 항아리를
열어보니 아뿔사, 된장이 바닥이 났다.
사기대접 하나 줏어들고 앞집 할머니께 된장을 꾸러간다.
할머니, 된장이 바닥 났어요. 된장 조금만 빌려주세요.
씩 웃으며 대접을 불쑥 내밀자 할머니는 아니, 집의 맛있
는 장 먹다 우리 거를 어떻게 먹으려고...
하시면서도 인심 좋게 듬뿍 채워주신다.


우리 시어머니 장 담그는 솜씨는 근동에 자자할 정도로
일품이셨다.
성격이 깔끔해서 좀처럼 이웃하고 얼싸덜싸 어울려 지낼
줄 모르는 서울 깍쟁이 아줌마같은 인상이어서 나하고도
간이 잘 안맞는 편이었지만 그에 걸맞게 입성, 먹성, 말
하는 것까지 어찌나 야무지고 똑 떨어지시는지 웬만큼
어리벙벙한 사람은 감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같이 코 맞대고 사는 고부의 스타일이 너무나 틀려서
같은 라인에 사는 아주머니들조차 소리 안내고 잘 사는
우리 고부를 보고 신기해 하곤 했다.


나는 성격이 워낙 대충대충이고 무딘데다가 급하기까지
해서 뭐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다.
사시사철 맨 얼굴로 버티고 바지 아니면 옷이 없는 줄
아는지라 외출준비도 1분이면 땡이었다.


무사태평으로 버둥거리고 누워있다 갑자기 뛰쳐 일어나
김치 담고, 청소하고 설겆이까지 일사천리로 후다닥 해
치워버리고 밖으로 냅다 튀어나가기 일쑤였다.
손이 무지 빠른 편이지만 그만큼 거칠었을테니 꼼꼼한
우리 어머니 눈에 찰리가 없었을게다.


그런 반면에 우리 어머니는 확실, 그 자체여서 일을 한
번 손에 대면 호비고 파고 끝장을 보셨다.
김치 담는대도 일박이일,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다 보면
하루종일 손을 놓을 틈이 없었으니 같은 일을 해도 며느리
년은 매일 노는 걸로 보이고 노인은 밤낮으로 손에 물 묻
히고 사는 것처럼 보여 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맨손으로 설겆이하고 걸레를 빨아도 노인은 꼭 빨간
고무장갑으로 무장을 하고 물통에 손을 담갔다.
얼굴이 타거나 말거나 모자도 귀찮아서 그냥 나다니는 며느
리에 반해, 어머니는 양산 없으면 절대로 외출을 못하는
줄 알았다.


처음엔 이런 어머니가 너무나 낯설어서 정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할머니가 아니라 내가 제일 싫어하는 새침떼기 서울여자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경우까지 발라 누가 뭐를 주면 꼭 그만큼 갚아야 직성이 풀
리는 성격이셨고 속옷 빼곤 위아래 옷들을 몽땅 주름 하나
없이 다려입으셨다.


세상에나, 적다 보니 이런 깔끔쟁이 노인하고 상당한 세월을
함께 보낸 내가 정말 기특하고 신통방통하다.
남들이 보기엔 보통 성깔이 아니었지만 나한테는 늘 한수
접고 들어가셨다.
있는 거라곤 배짱밖에 없는 며느리 건드려봤자 잇속이 없다는
판단을 하셨던게다.
생긴 것처럼 엄청 영리한 노인이었으니까.


그런 노인인데 세월 이기는 장사는 없다던가... 뇌출혈로 쓰
러져 두달째 병상에서 똥오줌 싸고 누워계신다.
자식도 제대로 못알아보고 아기같이 먹고 싸고 옹알이 하고,
아들 딸에게 당신 아랫도리 죄 내보이고 누워있는 모습이
기가 막힌데 주치의는 하드는 웬만큼 돌아왔는데 소프트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얘기만 한다.


내남지 없이 하드 망가지면 소프트도 따라 망가져야 팔자가
피는 건데 우리 노인은 그 복도 없네!
저 노인이 만약 정신이라도 있었다면, 똥오줌 싸고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당신 말로가 얼마나 기막히고 비참하고
그럴까? 어서빨리 숨 끊어지기만을 소망하실텐데..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그나저나 우리 노인네가 담아주신 그 기막히게 맛있는 장맛
이제 어디서 구경하지?
내가 손끝 야무진 며느리였다면 진즉 장담그기 전수를 받았
을텐데, 에구 나는 뭣에다 쓸까?
한심한지고.


장담그기 비디오 되돌리기를 해보면
잘 뜬 메주 서너덩이를 깨끗이 씻어 항아리에 담고 물을
조금만 잡는다.
그래야 간장 맛이 진하단다.
햇빛에 잘 익힌 다음, 간장을 따라 베수건에 싸인 멸치를 넣고는
세번쯤 폭폭 다린다.
그러면 기막히게 맛있는 조선간장이 나온다.


그런다음 메주를 으깨서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는다.
여기까진 남들과 같은데, 그러면 된장 맛이 짜서 맛이 없다고
우리 노인은 꼭 한가지 공정을 첨가한다.
바로 메주콩을 삶아 으깨서 된장에 섞으면 색깔도 노랗고
맛도 삼삼해서 그냥 쌈장으로 먹어도 무지 맛있다.


이론으론 웬만큼 가닥을 잡았는데 글쎄? 실전이...
어머니, 옹알이 하는 우리 어머니! 선머슴같이 제멋대로였던
이 며느리 가슴에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주세요.
미운 정 고운 정, 어머니가 담가주신 맛깔스럽고 진한 장처럼
그렇게 우리 고부의 가슴이 꽉 차도록.


꽃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