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만의 폭설이라고 하더니 날씨는 삼사년만에 기록적인 최저기온을 갱신하고 있다고 난리가 났어요. 바깥에 나가면 금새 꽁꽁 얼어버릴 것 같은 기온이었는데... 문득 오래된 가옥에서 생활하시는 친정부모님은 이 추운 겨울을 어찌 지내시는가 싶어서 방학을 맞아 몸부림을 치고 있는 아들녀석들을 앞장 세우고 쌍문동으로 향했어요.
남편을 연수보내고 딸애를 데리고 막내동생도 와 있으니 함께 얼굴도 볼 겸 겸사겸사 걸음을 했지요.
어머님께서 학원 가신 사이에 어묵조림도 하고, 장조림도 해서 혼자 계시는 동안 이것저것 반찬하시지 않으시게 준비를 해 두고는 출발을 했어요.
"어머님, 하룻저녁만 자고 올게요.... 혼자 심심하셔서 어떡해요?"
"심심하긴.... 하룻밤만 자고 오냐?"
"예..."
"잘 다녀와라..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구.."
아이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어요.
지은 지 20년이 넘은 친정집은 웃풍(윗바람)이 무척 심해요.
바닥은 지글지글해도 천정이나 창문틈새, 벽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바람때문에 코끝이 시린 지경인데, 기름값 아끼신다고 약한 온도로 해 놓고 사시는 거 안 봐도 훤해요. 전화로야 응, 걱정마라, 니들 덕분에 다 잘지낸다...하며 웃으시지만 썰렁하게 고드름이라도 주렁주렁 열린 것 같은 집안 온도를 모를까봐요??
시내에 볼 일이 있어 아이들 먼저 지하철로 보내고 일을 마친 후 저녁무렵에야 친정엘 도착했어요.
동네 친하게 지내시는 분이 저녁식사에 초대해서 거길 가고 부모님은 두 분 다 안 계셨고 막내동생이 반갑게 맞아주었지요.
시어머님께 잘 도착했다고 전화부터 먼저 드렸어요.
"어머님. 저녁은 드셨어요?"
"응, 근데 자꾸 누가 와서 딩동딩동 벨을 누르잖니? 무섭더라..."
"글쎄...누굴까요? 올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아참, 애들 친구가 오면 그렇게 말도 않고 자꾸 누를 때가 있었어요. 걱정말고 문 꼭 닫고 계세요."
혼자 계시는 것을 유독 싫어하시는 어머님, 아마 평생 외아들만 키우시고 외롭게 사셨기 때문일거예요...
아이들은 근처 사는 언니네집에서 놀다가 잠잔다고 전화를 했고, 동생과 둘이 겸상을 했지요.
아직 난소에 있는 혹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는 동생은 모처럼 보는 언니라구 부엌에서 만두를 지저내고 밥을 앉히고 하더라구여.
9시가 넘어서 엄마,아버지가 이웃집에서 돌아오셨고 늦게까지 앉아 얘기꽃을 피웠지요.
친정식구는 언제 어디서 만나도 참 좋아요.
그게 바로 핏줄이 땡기는 거, 그거 맞죠?
막내동생이 학교에 입학도 하기 전 일이에요.
고3인 오빠가 대입시를 앞두고 무리하게 공부를 하고 신경과민이 되다보니 과민성 대장증상이 일어났지요. 아시죠? 신경을 쓰면 장이 예민해 져서 바로 좍좍 쏟아지는 거.
평소에도 예민한 성격의 오빠여서 어디 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볼펜은 볼펜대로, 연필은 연필대로, 일렬종대 키순서대로 딱딱 줄맞춰 놔야 직성이 풀리는 오빠로선 대입시가 무척 큰 스트레스가 아닐 수가 없지요.
그래서 엄마는 오빠를 위해 그 당시 처음 판매하기 시작한 야쿠르트를 집으로 배달시켰어요.
장에 좋다고 하니깐...
예닐곱살의 어린 동생에게 야쿠르트는 달콤한 유혹이었지요.
아버지의 수고로움에 비해 수입은 너무나 적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먹을 수도 없었거니와 때에 맞춰 학교등록금을 낸 기억도 없거든요. 그러니 야쿠르트야 말로 그림의 떡이었지요.
오빠가 설사를 심하게 해서 약처럼 먹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 어린 동생은 냉장고에서 나 좀 먹어보시지...하고 앉아있는 야쿠르트를 조물락 조물락 만져보기만 했어요.
한 번 문을 열었다가는 다시 쾅! 문을 닫고,
조금 있다가 다시 문을 열어 야쿠르트를 쳐다보다간 다시 쾅!
문을 닫고...
그러다가 드디어 그 야쿠르트의 윗부분을 살짝 벗기기 시작했지요.
조금만 맛보고 다시 잘 붙여놓으면 되니깐.
조금만,조금만, 조금만.
아주 조금 맛을 보았을 뿐인데 눈에 띄게 야쿠르트는 줄어있었고,
쿵쾅대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다시 냉장고에 넣어놓았지만 예리한 엄마의 눈에 그것이 무사통과할 수는 없었대요.
어떤 아들인데, 지금 얼마나 설사로 고생하는데, 몇시간씩 얼마나 힘들게 버스를 타고 다니며 공부하는 아들인데....
엄마는 달콤한 유혹을 못 이긴 어리디 어린 딸보다는 고3 스트레스로 고생하며 수척하게 야윈 아들이 더 마음에 걸려있었던 터라 막내를 무척 야단을 치고 매를 들었대요.
눈물을 흘리며
"엄마, 잘못했어요... 오빠, 미안해..."
막내는 용서를 구했지요.
많은 세월이 지나서 막내동생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야쿠르트 아줌마를 만났대요.
어렸을 적 그 일이 생각 나 있는 돈을 몽땅 털어 야쿠르트를 다 사서는 앉은 자리에서 몇 개를 뜯어먹었는데......
그 맛이 아니었대요.
'겨우 이까짓 맛의 야쿠르트 때문에 그렇게 울어야 했던가'
하며 차라리 허무한 마음까지 들었다는 막내의 눈가엔 이슬이 맺혀있었어요.
어린 날 잊혀지지 않는 몇가지 기억 속에 그렇게 슬픈 기억이 자리하고 있어서 무척 속상했지요.
"그랬구나.... 엄마는 야쿠르트 좀 많이 사주지잉..."
엄마는 쓸쓸하게 웃으셨어요.
늦도록 얘기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지요.
다음날,
생활비에 보태라고 봉투를 내밀자 몇번 거절하시더니 고맙다며 받으셨는데 아버지께서 금방 기름을 사다 넣으시더라구여.
"고맙다. 니가 준 돈으로 기름 많이 사왔다... 뜨시게 지내마.."
보탬이 조금이라도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요.
찬 바람을 뚫고 집에 돌아오니 어머님께서 청소도 다 해놓으시고 저흴 반기셨어요.
아파트는 조금만 보일러를 돌려도 금새 따뜻해지고, 윗바람도 없고 따뜻한 물도 잘 나오고 얼마나 좋아요...
모두들 추위에 조심하세요. 어르신들은 빙판길이 무서우니 되도록 외출을 삼가시는 게 좋대요. 주부들도 나가실 땐 운동화를 꼭 신으시고요....
모두모두 건강하게 겨울을 났으면 좋겠어요.
평안한 저녁 되시길 바라며.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