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께서 인간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그러면서도 현실은 늘 미련이 남지요.
남편을 바라보는 저의 심정도 그렇답니다.
물과 불이라고 할 정도로 저희 둘은 상반된
성격과 가치관, 생활습관 등등으로 정반합의
무한궤도를 끊임없이 도는 악연을 이어가고
있으니까요.
시집에 가기 전과 다녀오는 길이면 항상 다툼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번 추석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었지요. 유치하게 구는 남편의 행태를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을만큼의 결혼 햇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정과 시집 대우에 차이가 날 때, 남녀를 차별하는
발언 등등에는 목숨 걸고 투쟁하는 마누라 때문에 남편이
피곤할 때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제가 백번 양보하더라도 말입니다, 대화 좀
할려고 하면 왜 말문을 닫고 마는지 도대체 그 내막을
모르겠단 말입니다. 심하면 집을 나가기도 했는데
작년에 작심하고서 그 못된 버릇은 고쳐놨습니다.
입만 열면 엄마엄마엄마...누나누나누나...동생동생동생...
놔두면, 믿고 지켜봐주면 어련히 알아서 시집 챙기고
자기가 못하는 효도 알아서 하겠습니까. 마누라를 못 믿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인간이 쪼잔해서 가만 못 있는 것인지
출발하기 전부터 애들이 먹는 씨리얼까지 시집에 갖다 준다고
주방을 뒤지고 난리를 칩디다.
장모님은 술 못드시니까 어쩌구...하면서 장식장에 넣어둔
양주를 죄다 꺼내서 엄마 한병, 누나 한병, 외삼촌도 한병,
이모도 한병...혼자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데 그 꼴이 또
왜 그렇게 밉살스럽죠? 하는 짓을 보고 있다가 열이 뻗쳐서
참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한마디 했습니다.
"그럼 어머님은 술 드시우?
우리 엄마는 갈비 좋아하시니까 갈비 한짝 사 드리면 되겠네."
눈이 뚱그레지더니 그때부터 닫은 말문이 다음날 새벽에
시집에 도착해서도 열리지를 않습디다. 기가 차서 정말...
꿍~~~~해서 제 속을 뒤집을줄 알았기 때문에 이왕
말 꺼낸 김에 한마디 더 했습니다.
"나도 형제 있고 친척 있어.
그리고 나도 선물들고 인사해야 될데도 있다구!"
시집에 가니 더 걸작이더만요.
일년이 다 가도록 장모님께 전화 한번 안하던 사람이
마누라가 자기 동생 애 들쳐업고 자기 누나 애들
밥 해먹이고 간식 먹여가며 과자 사먹여가며 차례 음식
만드는 거 보더니 어디서 그런 생각이 났는지 장모님께
전화를 하더군요. 그것도 안방에 있는 전화기를 굳이
거실에 들고 나와서 말입니다.
등에 매달린 애도 만만찮았지만 일 해놓고나면 꼭 한박자
늦게 딴소리 하시는 시어머니 때문에 일이 몇배로 힘들더군요.
실컷 밥 앉혀놓으면 좀 있다 앉히지...
고등어 구우면 아니다 갈치 구워라...
후라이팬에 올렸던거 도로 내리고...
김치 그릇 내 놓으면 그거 말구 다시 꺼내라...
미리 말씀해주시면 작히 좋겠습니까?
이런 소소한 반복이 사람을 지치게 하더군요.
그래서 아예 매번 어머님께 여쭤보고 하니 남편이
주방으로 뛰쳐들어오며 당신은 아직도 그렇게
어머니...어머니... 노래를 불러가며 일을 하느냐고...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란 말입니까?
제가 명색이 맏며느리고 결혼도 십년이 넘었습니다.
제 마음대로 생선 한가지 못굽고 밥도 제가 하고 싶은데로
하지를 못합니다. 그렇다고 시집이 법도 꽤나 따지고
엄한 집이냐...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저 어머님이 모든 것을 관장하셔야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거기에 군소리 없이 복종해야 하는 분위기 탓이지요.
때리는 시에미 보다 말리는 시누가 더 밉다는 말도 있듯이
어머님이야 주방에서 그러실수 있지요. 젊은 며느리가
하는 일에 몇마디 지청구를 놓을 수도 있겠지요.하지만
어머님이 뭐라 그러시면 방에서 뛰쳐나와 호들갑스럽게
어머님 역성드는 남편이 더 밉습니다. 삐져서 댓발은
나와있던 입이 그럴 때는 얼마나 말을 잘 하는지......
서울에서 싣고 내려간 물건들 시집에서 내려놓으니
트렁크가 비다시피 하더군요. 차례 지내고 친정에 가서
빈 트렁크 터지도록 채워서 올라올 때 즈음되니까
장모님...자주 전화 못드려서 어쩌구...
집사람이 주의를 주는데도 제가 바빠서 저쩌구...
그러면 친정 엄마가 하실 말씀이야 들어보나마나 아닙니까?
아이구...자네 바쁜거 다 아는데 괜찮네 마음쓰지 마시게...
엄마가 사위 민망할까봐 도닥거려주시면 진짜 전화 안해도
되는 줄 알고 그것 봐라...하는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봅니다. 그럴 때면 전 정말 이 말을 해주고 싶지만
제가 인격이 더 훌륭하니까 참습니다^^
이 사람아...아무리 말씀은 그리 하셔도 우리 엄마라네.
피는 물보다 진하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네.
당신이 내 속을 바글바글 긁고 있는 걸 알면
우리 엄마도 자네 미워하실 걸세...
휴...언제쯤 가슴 속의 말을 다 쏟아놓을 수 있을까요?
차례상도 제 식으로 한번 차려보고 싶고
추석 전날 아이들과 둘러앉아 송편도 빚으며
명절을 맞고 싶습니다. 뭐든지 죽은 조상 위주요
시장에서 사다 하시니 저는 지금도 시집, 아니
어머님의 방식에 적응이 되질 않습니다.
장남이라는 이유로 시집은 물론이요 어머님 친정까지
빠지지 않고 인사를 드려도 당연히 받아들이시고,거기에 비해서
시누이나 시동생은 일가를 이루고 있음에도 과일 하나만
사들고 와도 큰 일이라도 한 듯이 칭찬을 하시는 어머님.
매년 겪는 일이지만 겪을 때마다 맥 빠집니다.
자기도 못하는 효도, 처가에는 무심하면서
자기 부모에게 효도 하라고, 자기 형제에게 선심 쓰라고,
저는 얼굴도 모르는 자기 친척들에게 잘 하라고
왜 그렇게 강요를 하죠? 못하면 물론 저는 죽일 며느리가
되는 거죠.
그래도 한가지 성과는 있었습니다.
장손도 아닌데 저희가 시할아버님 제사도 모시거든요.
큰 집과는 의절하고 삽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도 골치 아픈 일이 많아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시할아버님, 시아버님 차례 모시고 난 다음에
저희 딸내미 둘과 시누이 딸내미 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차례상에 절 하라고 했습니다.
원래 조상 뵙는 것은 팔월부터 하는 것이니 이젠
명절 때마다 손녀들 제사에 참석시키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님도 아무말 안하시더군요.
자...먼저 증조 할아버지께 인사 드린다...
손을 앞으로 모두어 잡고 반절 하고....
두번 큰절하고...다시 반절하고...
이번엔 할아버지께 인사....
반절...옳지....큰절 두번하고...
할아버지...맛난 음식 많이 드시고 가셔요...
마음 속으로 말씀드려라....그리고 저희들
공부 잘하게 해 주셔요....부탁드리고....
자...마지막 반절...옳지......
저의 구령에 맞춰 손녀들 네명은 차례를 드리고
졸졸이 물러나왔습니다. 남편이 뒤에서 역시 당신은
여권운동가야...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해댔지만
흥...그런다고 내 마음이 풀릴줄 알어?
자기가 먼저 애들 절 시켰어야 되는거 아닙니까?
내년 설부터는 음식을 제가 해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시동생은 과일, 시누이는 떡을 맡기로 하구요.
일년에 겨우 몇번 모여서 죽어라...일만 하고
가족간에 대화도 없이 그럴 필요가 없는 겁니다.
다 산사람 만나자고 하는 짓인데 시대에 맞춰서
며느리도 어머님도 좀 편해져야지요.
십년만에 어머님도 그리 하라고 하시더군요.
자기 집에 가서 허리도 못펼 정도로 혀에 바늘이 돋도록
마누라가 일 하는 걸 봐서 기분이 좋아진 남편이
당신이니까 이렇게 하는거야 허허허...혼자 호탕한 척
웃어 제끼더만요. 시집에서 이렇듯 진을 빼고 가면
친정에선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가 없습니다.
시어머니보다 이십년 더 연로하신 친정엄마를 도와드려야
하는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꼼짝 할 수가 없죠.
그저 눕고 싶고, 시집 생각하면 다시 부아가 치밀고,
남편 꼴도 보기 싫고...
어쨋든 추석은 지나갔습니다.
이제 시할머님 생신과 돌아서면 또 설날이 있군요.
언제쯤이면 바껴질까요?
저도 이제는 강요된 효가 아니라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진정한 효도를 하고 싶거든요.
휴......
저보다 몇 배 더 힘든 명절 보내신 선배님들도
많을텐데 써놓고 보니 부끄럽네요.
우리 주부들이 시집부터 조금씩 바꿔나가면
자식들 대에서는 좋아지지 않을까...하는데
네?...어림 반푼어치도 없다구요?
한국 시집은 절대 안 바뀐다구요?
그래도 노력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