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점점 둥글어지고
추석이 며칠 앞으로 다가 서고 있다.
어른이 되고 사람노릇을 하며 산다는 게
새삼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 저기 챙겨야 할 곳도 많고
오라는 곳 없어도 가야할 곳은 많다.
머리속이 벌써부터 어수선해진다.
처음에 시집와서 몇년은 며느리가 나 하나라서
작은집의 큰며느리인 나는 늘 어머니와 둘이서
동동거리며 식구들 맞을 준비를 하였는데...
지금은 손아래 동서가 생겨서
설겆이라도 해 주니 많은 도움이 된다.
추석이면 집집마다 방앗간에 줄서서 떡가루를
빻아다가 정성스런 손길로 송편을 빚는다.
어머니께서는 이른 봄 여린 쑥을 뜯으시어
소다를 넣어 새파랗게 데쳐낸 쑥을
냉동실에 고이 간직하셨다가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그 쑥이 해동을 한다.
어쩌면 이렇게 색깔이 고우냐는 나의 말에
어머니는 늘 어머니만의 노하우가 계시는 듯
하여 어깨넘어 한참을 부러운 시선을 보내 곤 하였다.
송편을 빚어본 이들이라면 아마 다 아실테지만
예쁘게 빚으려면 서툰 솜씨로는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서야 얻어짐을 아실 것이다.
시집와서 몇년을 거의 그 많은 송편을
혼자서 다 빚어내곤 하였다.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저린 다리를 하고 중간에
그만 하고 싶어도 말한마디 못하고 떡반죽이 모두
고운 모양으로 다 태어나도록 그리하였는데.....
손아래 동서가 들어오니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처음 함께 맞던 추석이 생각난다.
그런데 동서는 시집오기전에 한번도 송편을 빚어 본적이
없었던지 전혀 동참할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엄두가 안나서 그러려니 하고 몇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고도 몇번의 추석을 지나는 동안 여전히 송편은 나의
몫이 되어 언제나 떡만드는 사람으로 지정이 되어버린거다.
아주 자연스럽게....
어느 추석인가에는 혼자서 다하기엔 너무 지루해 보였는지
아버님께서 작은며느리에게 송편빚는 일을 거들라고 하셨다.
지엄하신 엄명(?)인지라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던건지
만두인지, 송편인지 분간이 안가는 송편이 탄생하고 있었다.
나는 그 탄생을 지켜보면서 웃을수도 없고,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시집왔을 때 내모습이 생각 났다.
손끝여물기로 소문나신 우리 어머님의 눈에는 나도 아마
그리 어설프게 보이긴 마찬가지였을 터인데.....
하지만 딸 둘을 키우는 나로서는 이다음에 나의 딸들에게
어느만큼의 솜씨를 배우게 하여 시집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우리 어머니
지금은 변변치도 못한 큰며느리 믿으시고
오늘은 이거 해먹자 하고 재료만 텃밭에서 가져다 놓으시곤
하신다.
설겆이는 동서가, 부지런히 만들고 하는 일은 어머니와 내가
하는 편이다.
명절이 다가 오니 돌아가신 친정어머니 생각도 나고,
뭐든지 맛깔스럽게 음식 잘하시던 내 할머니 생각도 난다.
살아계시다면 이젠 내가 무언가 해드릴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은데.....
시댁에서 명절을 지내고 다들 친정에 간다고 바쁠 즈음에
벌써 친정으로 오는 시누이들 치닥거리를 하면서
내 어머니에게로 가서 마음 편한 수다를 떨고 싶다는 생각을
한적이 참으로 많았다.
돌아갈 친정이 없는 것 같이 친정어머니가 안계신 자리는
너무도 그 공백이 크기만 하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정 동기간들은 큰언니네 집을 친정으로
알고 모이곤 한다.
시댁에서 명절을 보내고 다들 친정에 가서 조금쯤은 여유로운
시간에도 나는 또 동생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 했다.
따로 시장을 보아 두고, 돌아와서 어떻게 지낼까 하는 궁리를
하며 시댁으로 가곤 했지.....
몸은 좀 피곤해도 마음만은 한없이 푸근하게 지내고 싶은
빨간 글씨가 눈앞에 선명하게 다가선다.
자주 만나지 못하고 살던 친지들을 만나서 즐겁게 지내는 것으로
명절이 가져다 주는 여러가지 부담들을 떨쳐 낼수 있으리라 본다.
빡빡하기만 한 일상에서 조금쯤 벗어나서 홀가분하게 며칠을
지내볼수 있다는 것으로.....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해준 조상님들을 찾아 뵈며,
자신의 오늘로
다시금 힘있게 돌아올 수 있다면
미리 부터 명절증후군을 앓지 않아도 될 수 있을 듯 하다.
달은 점점 차 오르고 있다.
달이 기울기 전에
이 방에 계신 모든 님들에게
좋은시간들이 많이 찾아올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