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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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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비가 싫은 여자


BY 바늘 2001-09-11


난 수제비가 정말 싫다.

커다란 양푼에 밀가루와 물 그렇게 간단한 재료를 넣고 팔팔 끓는 물에 손으로 떼내어 조금의 간만 하면 완성되는 그 수제비, 난 그 수제비가 정말 싫다.

어떤 사람은 어릴때 하도 보리밥을 먹어서 요즘 건강에 좋다는 보리밥집에 가서 식사를 할때도 극구 사양하면서 쌀밥으로 주문하여 나물 넣고 비벼먹는 것을 보았는데 나 역시 수제비에 관한 아련함과 조금은 빛바랜 회색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친정 어머니는 정말 대단한 사업가셨다.

사업가라면 말이 좀 거창하지만 난 어려서 부터 어머니가 집에서 그냥 한시도 손 놓고 계신것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직업은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한복점을 운영하셨다.

상점에 온갖 고운 색의 옷감들이 차례로 걸려있고 그 옷감들이 질감도 다 달라서 난 학교 파하고 나면 그 가게로 쪼르르 달려가서 진열되 있는 옷감들을 만지작 거리고 새로 물건이 들어오면 그 한복감 한벌에서 여유분이 있는지 물어보고 가위로 끝을 잘라 내 긴머리에 질끈 묶어 멋을 내곤했다.

그리고 거울 한번 바라보면 왜그리 신이나던지 때론 너무 고운 색에 반하여 그만 어머니 몰래 여유분이 없는 옷감에 가위질을 겁없이 하는 바람에 혼줄이 나기도 했었다.

그렇게 나에게 고운빛을 선사했던 어머니의 1차직업은 몇년간 계속되었고 마음 좋은 우리 어머니는 늘어가는 외상장부 속에서 허우적 거리시더니 끝내 그 가게를 접게 되셨다.

그리고는 고향이 이북이셔서 아주 맛갈나는 요리 솜씨를 갖고 계셨기에 냉면집을 또 별 고민 없이 개업하셨다.

하기사 어머니가 고민이 있었는지 사전 개업 준비에 얼마나 고심을하셨는지는 나도 어렸으니 자세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눈에 어머니는 뭐든지 후다닥 행동이 무척 빠르신 분이셨다.

냉면집을 개업하시고 난 냉면 육수를 만드는 것을 옆에서 또 지켜보게 되었다.

한복점을 접으시니 내 머리장식을 할 그런 재미짐은 사라졌지만 그 특이한 물냉면의 정갈한 맛은 또 나에게 즐거움을 주게 된것이다.

고기 육수에 생강과 간장을 넣고 어머니 나름대로 만드신 그 냉면은 정말 일품이었다.

그런데 장소에 문제가 있었는지 고정 단골들은 있었는데 손님이 그리 늘어나지는 않았고 지금 어렴풋 떠오른 기억 하나를 건져올리면 그때 동사무소 직원들이 쿠폰을 끊어서 고정식을 하였던것 같다.

그렇게 한여름을 보내고 어머니는 아니다 싶었는가 이번에는 또 부동산 시장에 눈을 돌리셨다 그 옛날에 말이다.

정말 대단한 분이셨던것 같다.

집을 사시고 파셔서 두어채 집을 장만하셨던것 같은데 그만 사기를 당하셔서 집도 날리고 아버지와 그일로 인하여 다투기도 하시고 남의 돈을 빌리셨는지 어느날 집에 차업딱지가 붙여지게 되었다.

붉은 도장이 찍혀있던것 같았는데 여기 저기 집안에 내가 그리 즐겨보던 타잔 나오는 그 보물상자 텔레비젼에도 그렇게 딱지가 붙게 된것이다

얼마후 다시 떨어졌지만 공포감과 불안감이 느껴지던 상황이었다.

그리고는 그때 내가 평생 싫어하게된 수제비와 질긴 인연을 맺게 되었다.

쌀이 떨어져 함께 사시던 생활력 강한 우리 할머니는 밀가루가 분량도 많이 나가고 가격도 훨씬 저럼하니까 끼니마다 자주 자주 그 수제비를 단골 메뉴로 선택하셔서 난 억지로 그 밀가루 조각들을 먹었는데 그때 하도 먹어서 지금도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난 수제비가 싫다.

그때 하도 질리게 먹어서 말이다.

수제비 이야기를 하면서 어머니 직업 이야기를 하였으니 마자해볼란다.

어머니는 그렇게 실패한 복부인을 접으시고 다시 집에서 단골손님 위주로 한복점을 하셨다.

잠시였다.

가을이 오고 김장시장이 개장되었다.

나는 중3 졸업반이었고 고등입학 서류에 부모님이 직접 학교에 오셔서 진학서류에 도장을 찍고 선생님과 상담을 하여야 하는데 어머니는 배추 차띠기를 하신다면서 강원도로 출장을 가시고 담임 선생님과의 약속도 잊으셨는가 그만 밤이 아주 깊어서야 그렇게 전교 꼴찌로 나타나셔서 나의 마음을 애태우게 하셨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퇴근도 못하고 계시던 담임 선생님께 얼마나 죄송하던지 어머니는 그당시 사춘기 딸내미의 상처난 마음을 짐작이나 하셨을까?

그렇게 어머니의 직업이 하나 더해가고 그다음 횟집을 연안부두에 개업하셨다.

내가 여고에 입학한뒤였다.

지금도 횟값은 만만치 않은데 그당시도 그랬는지 학교에 선생님들은 가아끔 어렵게 나를 불러 어머니의 그 회를 드시곤 했다.

난 버스를 타고 어머니가 한상 그득 고물 고물 싸주시는 것들을 가져다 선생님들께 회식(?)을 시켜드렸다.

어머니의 직업따라 어머니도 자츰 기운도 빠지시고 세월이 흘러갔다.

그리 자주 바꾸시던 업종에서 그래도 횟집을 제일 오래 하셨던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대단한 의문점은 언제나 어머니의 지갑은 썰렁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손이 크셔서 외상도 잘주시고 때론 선심도 잘쓰셨기에 돈을 크게 버신적은 단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늘 바쁘던 어머니 그리고 조용한 성품의 아버는지 참으로 대조적이셨다.

아버지는 직장생활을 하셨는데 아버지가 버신돈을 어머니는 오히려 어머니의 일에 가져다 쓰시는 입장이었으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가 그리 곱지는 않으셨다.

왜 어머니는 그렇게 자신의 일을 하려고 하셨을까?

난 늘 실패에 가까운 어머니의 일들을 바라보면서 엄마처럼 안살거야 를 마음으로 수없이 되네이곤 했었다.

지금 40대 중년이 되어 한가정의 어머니가 되어 있는 나는 지난날 어머니가 성공은 못하였지만 어머니의 그 끝없던 도전 정신에는 참으로 찬사의 갈채를 보내고 싶다.

난 지금 뭘좀 해야지 해야지를 반복하면서도 늘 제자리를 맴돌고만 있다.

어머니의 그 용감하던 창업 정신은 나에게 대물림 안되었나보다.

주변에서는 내게 종종 그런다.

집에서 살림만 하기에는 좀 아까운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난 왜 나의 어머니 처럼 그렇게 나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수제비를 그려보려던 이아침 한참 이야기 하다 보니 어머니 이야기로 끝을 그리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 대하여....

아무튼 어찌 되었든 난 수제비가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