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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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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정


BY dlsdus60 2001-06-16

초등학교 2학년 9월 초순경으로 기억되는 일이다.
큰형과 작은형은 광주에 셋방을 얻어 할머니가 보살피며 유학(?)을 하던
중이였고 고향 보성에서는 누나, 형 그리고 내가 집에서 십리가 떨어진
읍내에 자리 잡은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변변치 않는 우산 하나 없어 비오는 날이면 남매들은 한 두개밖에 없는
우산을 서로 차지 할려고 싸움을 수 없이 하였다.
이를 보지 못한 어머님은 빈 비료포대로 뛰어난 바느질 솜씨를 발휘하여
비옷을 만들어 주셨는데 어느 누구도 그 것을 입으려하지 않았다.
왜냐면 비옷에 요소비료, 복합비료 등등 여러가지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저
있었기 때문이였다.
집 안에서나 잠깐 입고 벗어 놓을 뿐 학교까지 입고 다니기에는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고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였다.
그런 저런 이유로 어머님께 꾸지람도 많이 들었다.

어느날, 등교를 하려는데 날씨가 꾸물거리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산은 다 망가져서 쓰기에는 불편하고 달랑 아버지 우산 하나
있는데 그 것은 우리들이 사용할 수 없는 그림의 떡 같은 존재였다.
하는 수 없이 가랑비를 맞고 학교에 갔는데 하교를 하는 시간이 되어도
비는 멈추지 않고 있었다.
4학년인 형을 만나 학교를 나섰는데 빗줄기는 점점 굵어 지기 시작했다.
둘은 구멍가게 처마 밑에 앉아 비가 가늘어 지기를 기다리다 시간이 많이
흘러 버렸다.
어쩌다 한 번씩 지나가는 버스도 차비가 없어 탈 수 없고 해서 책보자기를
어깨에 둘러 매고 고무신 타는 냄새가 나도록 신작로를 달려 집에 도착을
하였다.

숨을 헐떡거리며 마루에 올라 앉아 있는데 아버지께서는 누나가 안 왔다며
둘이 누나 마중을 나가라고 하셨다.
싫다고 하면 노여워 하실 아버지가 무서워 싫은 내색 한 번 못하고 저녁도
거른 채 누나 마중을 나갔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는 쌀쌀함을 대지위에 뿌리고 이렇게 비내리는 밤에는
달걀 귀신이 출몰한다는 닥재와 도깨비가 산다는 모래재가 눈에 아른거려
발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곳을 혼자 비를 맞고 올 것 같은 누나가 걱정되어 우리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학교를 향했다.
아직 땅거미가 완전히 내려 앉지 않은 상황이라 가끔씩 신작로를 지나는
트럭과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학교에 도착하자 누나의 교실에서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왔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교실을 향해 줄달음 쳤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 불빛은 누나의 교실에 켜 있는 불빛이
아니라 건너 편 교무실에서 반사된 불빛이였다.
텅빈 교실을 보며 허탈한 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고 십리 길을 둘이서
되돌아 갈 생각을 하니 달걀 귀신이며 도깨비 형상들이 자꾸 눈 앞에
어른거려 도저히 발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참을 주저 앉아 징징대고 있는 나를 다둑거리며 형은 내 손을 잡아 끌고
읍내를 벗어나 어둠속에 하얀 배를 드러내고 있는 신작로를 들어 섰다.
발 걸음소리에도 놀라 온 몸의 솜털은 곤두섰고 어둠이 내려 앉은 나무며
산이 짐승처럼 무서워 보였다.
온 몸은 비에 젖어 한기에 떨었고 걸을 때마다 자꾸만 내려가는 고무줄
바지는 비를 먹어 걸리적 거렸다.
하지만 이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달걀 귀신이 나온다는 닥재를 지나는데 도저히 눈을 뜨고는 걸을 수 없었다.
형의 팔에 의지하며 눈을 감고 걷는데 감긴 눈을 뚫고 흘러 내리는 눈물이
빗물과 섞여 혀 끝에 닿자 비릿한 맛과 향이 달걀 귀신 냄새처럼 느껴졌다.

고갯 길은 길고 길어 심봉사의 답답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형도 소리없이 훌쩍거리고 있었고 나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앙!~앙!~하고
울고 싶었지만 혹시 귀신이 우는소리를 듣고 우리에게 나타날까 봐 이를
악물고 울음소리를 삼켰다.
그렇게 한 참을 걷고 있는데 내 까만 고무신이 한짝이 벗겨져 길옆 작은
개울가로 빠져 버렸다.
형제가 고개를 쳐 박고 아무리 ?고 ?아 보았지만 어두운 밤에 풀섶에
숨어 있는 고무신을 ?기란 사막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일이였다.
흐르는 눈물에 앞이 보이지 않아 손으로 더듬고 발로 뒤져 보았지만 허사였다.
형은 신발 하나도 제대로 신지 못한다며 갖은 구박을 하면서도 열심히
풀섶을 뒤졌다.
한참 동안을 헤매다 고무신을 포기하고 장애자가 된 듯한 걸음으로 고개를
넘어 오는데 무서움은 전신에 그물를 뒤집어 씌운 듯 포박하였다.
그 무서움에 떠는 나를 보며 형은 비장한 마음으로 명언을 하나 남겼다.

"형제는 용감하다!"

하지만 그 말이 무슨 소용 있을까? 귀신 앞에서 맥없이 무너질 형이 뻔한데....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길 옆 바위 밑에 앉아 얼싸 안고 엉엉 울고 말았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는데 빗소리에 젖은 사람의 목소리가 간간히 들려 왔다.
그 소리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우리의 무서움은 극에 달했다.
이제 우리는 죽었다. 달걀 귀신이 우리를 잡으러 온 것이라고 생각하니
숨소리도 멈쳐 버렸다.
아버지는 우리가 미워서 일부러 누나 마중을 나가게 해서 귀신에게 잡혀
가도록 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버지가 너무나 원망스럽고 미웠다.

고개를 땅에 떨구고 울고 있는데 검은 물체가 가까이 다가오며 우리의
이름을 불렀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진짜 어머니가 맞을까?... 두려움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흐느끼는 우리의 어깨를 가슴에 안고 일으키시던 어머님의 따뜻한 품속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무서움은 도망을 하였다.
어머님은 잃었던 고무신을 다시 ?고 나는 든든한 어머님의 팔에 매달려
그 밤 집으로 돌아 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밤의 어머님은 내 곁에 없다.
고향 집 문풍지에 젖어드는 달빛의 무게도 이기지 못하고 돌아 누워 쓸쓸히
주무시고 계실 것이다.
어머님의 고르지 못한 숨결에 들썩이는 갸냘픈 어깨가 두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