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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이야기 3 ----그녀들의 江


BY 금빛 누리 2001-06-12

땅거미가 스믈거리며 내려깔리는 거리에 그는 망연히 서있었다.
어디로 가야할까? 진정 어디로 가야할까?
16년을 궂은일 좋은일 함께하며 살아온 아내가 조촐한 결혼 기념일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는 집과 때로는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여인이
기다리고 있는 그 오래된 찻집.
" 여보, 오늘 알죠? 8시 땡하기전에 꼭귀가해야해요."
" 응, 그래.올 때 케익 사올께."
" 생크림 케익이예요. 잊어버리면 안돼요."
아내는 행여 그가 잊어버릴새라 현관을 나서는 그의 등뒤에서 또 한번
" 생크림이예요."하고 다짐을 주었다.
직원들이 먼저 퇴근하고 잔무를 정리하고 그가 막 퇴근하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저.. 지금 퇴근할거죠? 그럼 좀 나오실래요?"
그녀, 인우의 음성은 언제 들어도 낙엽 냄새가 났다.
적당히 깊고, 적당히 쓸쓸하고, 적당히 건조한----------
" 왜 무슨일있어?" 그는 내심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물었다.
" 아니요. 그냥.....당신을 지금 꼭 만나야만할것 같아서요.
난 지금... 당신이 필요해요. 와주겠지요? 여기 ㅁㅁ찻집이예요.
당신과 내가 3년전 처음 만나 데이트했던 ......"
인우의 목소리에 어떤 정체불명의 다급함과 절실함이 느겨졌다.
" 무슨일인지 말해봐. 응? 무슨일이 있는거지?"
" 그냥.....오늘밤 당신이 필요해서예요.
당신은 나를.....이 세상의 누구보다 사랑한다고했죠?
정말 그러하다면 지금 당장 나에게로 와주세요."
" 인우, 미안해. 오늘이 결혼 기념일이야. 아내와 아이들이 날 기다리고 있다구.
아침에 케익 사가지구 들어가겠다구 약속했거든. 정말 미안해.
우리 내일 만나자 응?"
그는 인우가 이해해주리라 생각하며 말했다. 그러나 인우는 예전의 그녀와 달랐다.
예전의 인우는 가정이 있는 그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주었다.
" 난...... 당신을 3년이나 기다리며 살았어요. 어쩌면 당신이 나를 선택해줄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요. 기다릴게요.8시까지 와주세요."
그가 미처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그는 서둘러 인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그녀의 휴대폰은 꺼진 상태였다.
인우가 기다리고 있겠노라한 찻집은 그의 집과는 정 반대 방향이었다.
러시 아워의 교통 체증까지 감안한다면 곧바로 집으로 출발해도 8시전에 도착할까 말까한 시간이었다.
저녘 무렵의 부산함에 거리는 활기가 넘치고 어느새 색색의 불빛이 피어나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았다. 그는 마치 행선지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방향을 잡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그가 피해갈 수 없는 운명처럼 인우를 만난것은 3년전쯤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던
여름밤이었다. 철없었던 때 만났던 남자와의 이혼이란 상처를 가진채 홀로서기에
성공한 여자-------인우는 강하고 사려깊고, 다정다감한 여자였다.
그는 아내에게 형언할 수없는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인우에게 깊이 침몰해갔다.
인우역시도 그가 유부남임을 잘 알면서도 이래서는 안된다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에게 빠져들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의 관계를 흔히 불륜이라고 할것이다.
작은애는 남편이 안고 큰애는 엄마손을 잡고 그의 곁을 지나가는 어느 가족의
단란한 모습이 문득 시야에 꼿혔다. 아마도 오랫만에 가족 나들이를 나온것이리라.
젊은 아내는 남편에게 무어라 쉴새없이 이야기하며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띄웠다.
아빠 팔에 안긴 작은애도 무어라 옹알옹알거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는 아내를 생각했다.참 무던한 여자였다. 5남매 집안의 맏며느리로 일년전 작고한
홀 시어머니를 편안히 모셨음은 물론이고 집안의 대소사 일일이 챙기며
시동생, 시누이 줄줄이 뒷바라지하며 힘든것, 싫은것 내색않고
오직 그를 하늘처럼 믿고 살아온 여자이다.
그러한 아내가 지금 집에서 결혼 16주년 기념상을 차려 놓고 남편인 그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는것이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화기 저편에서 뭔가 호소하던 인우의 음성이
귓가를 맴돌았지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 오늘은 안돼, 인우! 오늘만은 안된다구!)

찻집 <물푸레>. 약간 어두운 조명 아래서 인우는 마즌편 벽의 시계를 보았다.
8시 30분. 그랬다. 정확히 약속 시간에서 30분이 지나있었다.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찻잔을 그녀는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퇴장해야하는 때임을 절감했다.
그의 아내가 인우를 찾아온것은 며칠전이었다.
" 이젠 세사람의 관계를 정리해야한다고 생각해요.
만일 남편이 인우씨를 선택한다면 난 깨끗이 물러나겠어요.
인우씨도 그러하실 수있죠?"
자그마한 키에 순한 눈매를한 그의 아내는 차분하게 말했다.

인우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휴대폰의 숫자를 찍었다.
저편에서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결혼 16주년 축하합니다. 그분은 결국 부인을 택하셨어요.
우리들의 약속대로 전 이제 그분곁을 떠나겠습니다.
그동안.... 부인께 참 죄송했어요. 그분을 ...이해하시고 용서하시고 , 그리고..
많이 사랑해주세요.전 사실 그분이 나를 선택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는데......
많이, 아주 많이 행복하세요."
" 고마워요.정말 고마워요. "
전화기 저편의 여자는 나즈막히 말했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와 웃음 소리, 그리고 굵직한 남자의 음성이 뒤섞여 들리고
여자는 전화를 끊었다.
인우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씁쓰레했다.
이외로 담담한 심정으로 그녀는 찻집을 나왔다.
내일 아침엔 이 도시를 떠나 그녀가 자란 저 남녘땅으로 떠나리라 .
초 여름밤의 달작지근한 바람이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어루만지며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