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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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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부림스<12>-난 니 꺼야.


BY eheng 2001-03-11


봄이 왔다.
조선 팔도 삼지사방 방방곡곡 봄이 왔다.
미친 년 달래 캐듯 새벽에 우는 암탉 모양 그렇게 봄은 왔다. 우물가 물 깃는 숫처녀 가슴에도, 돌쩌귀 차는 돌쇠 가슴에도, 소달구지 몰고 가는 노인네 가슴에도 봄은 왔다.
배배 말라 비틀어진 돌담 밑의 엉겅퀴 가시 같은 우리네 가슴에도, 가뭄에 쩍쩍 갈라진 논 바닥 같이 메마른 우리 몸부림스의 마음에도 봄은 어김없이 오고 말았다.
봄이 오면 언덕 위로 어찔어찔 아지랑이 피어 오르고, 스믈스믈 물이 오르는 버드나무 가지들... 산새 들새 우짖고, 강남 갔던 제비 돌아온다. 봄 바람이 손짓하며 살랑댄다.
이 자연의 변화에 어찌 동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들로 산으로 뛰쳐 나가고 싶은 마음 누를 길 없다.
자연은 아름답다. 신비하다. 하지만 마냥 아름답다고 한 것은 아니다.
교복을 벗고 촌스런 사복 차림의 뽀글이 파마를 하던 신입생 시절, 그 자연의 아름다움을 진정 깨달게 해 준 몸부림스가 있었으니... 연애학의 대가요, 기법의 선구자인 혜경이었다. 수업시간에는 항상 지각하는 그녀가, 졸기만 하던 그녀가(그녀의 말로는 명상 중이라고 했지만) 거의 신기에 가까운 전략과 전술을 구가하고 있었다.
학생 휴게실, 공강 시간이면 언제나 대여섯 명의 제자들이 둘러 앉아 그녀의 설법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흥미진진한 것은 역시 첫 키스에 관한 얘기다.

"어떻게 해야 되니?”
“그건,… 시간과 공간의 절묘한 조화, 즉 타이밍의 예술이다.”
그녀가 설파한 작전은 이것이다. 주말을 이용해서 남자친구와 근교로 나들이를 한다. 그런 곳에 나가면 항상 그림처럼 나즈막한 산이 나타난다. 자연을 즐기기라도 하는 양, 마치 자연의 일부인양 그곳으로 들어간다. 조금 오르다 보면 한적한 장소가 나온다. 숨이 가쁜 듯 하~하~하~ 몰아 쉬면서 잠시 쉬었다 가자며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어떻게 해?”
“그냥 누워.”
“누우라구?”
“누우면서 자연은 언제나 아름다워. 우릴 위해 있는 것 같아. 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다 알아서 하게 되 있어.”
“우와~! 근사하다.”
그렇게 우리는 순진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하나 둘씩 배워갔다.
나도 그 <자연은 아름다워>작전 써 봤다. 산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하필이면 너무 가팔라 목숨을 걸고 벼랑을 올랐다. 두리번거리며 겨우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곳을 찾아 앉으려고 하자 볼 일 보려는 줄 알고 황망히 자릴 비켜주는 바람에 작전에 실패했다.
또 있다. <그윽한 눈길 작전> 음침한 카페에서 그윽한 눈길로 쳐다보면 사랑 고백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그대로 했다. 이 작전은 말로는 쉽지만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조명의 각도와 조도, 앉은 자세, 음악까지 절묘하게 맞아야 한다. 다리는 꽈야 하고 약간 옆으로 비튼 자세로 허리가 빠지도록 앉아서 그로테스크하고 멜랑꼴릭하게 눈물이 나오도록 쳐다보는데 갑자기 심수봉의 노래가 뽕짝뽕짝 흐른다. 그러더니 나에게 묻더라. 혹시 약간 사팔 아니냐고.
경옥이 어쩌다 한 번 한 키스에 맛 들려 시도 때도 없이 하고 다니다가 예의 그 실험정신 발휘하여 대낮에 길거리에서, 뻥 ?돋?카페에서 시도했다는데 쳐다보는 사람 없었다고 열 불을 낸다. 한강의 둔치, 삼청 공원, 놀이 동산의 풍차, 엘리베이터, 으슥한 골목길,... 물불을 안 가렸다고도 한다. 그렇게 몸부림치며 연애하더니 왜 이제 와서 후회하는가!
한 겨울 밤, 학교 앞의 카페에서 식은 커피 한잔 시켜 놓고 세 시간을 죽 때린다. 그런 곳엔 화장실이 안에 없고 열쇠 갖고 모퉁이 한참 돌아가 한갓진 데 있었다. 춥고 무서워 참고 참다가 인간의 한계에 부딪혀 카운터에서 열쇠 받아 볼 일을 보러 나갔다. 화장실서 나오는데 앗!
그 남자, 화장실 앞에서 망을 봐주는 게 아닌가! 자상도 하여라.
그런데! 다정하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게 아닌가!
아!!! 난 오늘 밤 이대로 무너지는구나.! 난 너무 감격하여 내미는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랬더니 말하더라.

“열쇠 줘요. 나도 볼 일 보게…”
망했다. 혜경이가 하면 백발 백중 성공하는 작전들이 왜 내가 하면 하는 족족 망신살이 뻗치는 지 모르겠더란 말이다. 그 열쇠 줘요 하던 남자, 지금도 화장실서 소리 꽥 지른다.

"화장지 줘."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절대로 다정히 손 잡아 주지 않을 거란 걸...
혜경이의 전략 중 백미는 역시 <넌 내 꺼야> 작전이다.
물색하던 중 이거다 싶은 남자가 나타나면 바로 점을 찍는다. 그리고 주위의 온갖 인맥을 동원하여 작업에 들어간다. 마치 우연을 가장한 인연인 것처럼 연극을 한다. 리허설이 필요 없는 완벽한 각본을 쓴다. 서클에서, 식당에서, 심지어 화장실과 길거리에도 우연한 만남을 가장한다. 그 우연에 남자는 힘없이 무너진다. 그렇게 혜경이는 성공한다. 얼굴 이쁜 X이 머리도 좋다
학교엔 절대 안 와도 데이트하러 학교 앞엔 꼭 나오는 주희, 수업엔 들어오지도 않을 거면서 남자친구 데리고 그리도 교정을 쏘다니던 정미, 과 사무실 작은 편지 통 꽉 메워 버리던 연지의 문학청년, 꼭 쌍으로 만나고 쌍으로 헤어지던 원주, 안 만나준다고 학교 앞에서 두러 눠 시위하던 애자의 오빠!,... 그리도 난리 치며 만나던 남자들, 지금 데리고 사는 몸부림스 별로 없는 걸로 안다. 하지만
그때 하릴없이 찍던 버릇 아직 못 버리고 우리 몸부림스 길거리 반반한 남자만 보면 점을 찍는다. 침 발라 꾹꾹 찍는다. 넌 내 꺼야 하면서.
이젠 그러지 말 일이다. 조금은 고통스럽지만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젠 전 세계 반인 모든 남성들에게 그 가능성을 열어 두자. 너무나 많다고? 벅차다고? 하지만 우리 몸부림스 그 정도 아량은 키워 왔다.
이제 큰 소리로 외치자. 난 니꺼야! 라고.
몸부림스, 이젠 그 어느 한 사람 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 우리 동네, 우리 나라, 아니, 전 세세의 모든 인간들을 다 품을 수 있고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의 것이 아닌, 내 가족과 동네와 나라와 인류를 위해 있는 것이라고 드높여 외치자. 우린 이제 너희들 꺼다. 너희 모두를 품어 안겠노라고.

몸부림스여!
화창한 봄날 거리로 나가서 외쳐보자.
난 니 꺼야!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