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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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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가 되어


BY 심향 2001-01-21

또 하얗게 눈이 내렸다.
먼 행길가에서 나즈막히 들려오는 차바퀴 소리만으로도 눈이 왔음을 감지하는 남편은 여느때와는 다르게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 커튼에 가려진 한폭의 설경.
이래저래 나무는 바람에,톱날에.설화에 가지들이 무참히 꺾여져 버렸다.
상흔위에 또다시 핀 설화.
거부하지않는 겨울나무의 의연함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흐느적 거리던 감나무 가지도 오늘만큼은 흰눈을 이고 꼿꼿하게 버티고 있다.
살아 있음이 이렇게 변화무쌍할 수 있을까.
매순간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들.
때로는 타성에 젖어 녹슨 기계처럼 삐그덕거리며 돌아가지만 그것만은 결코 아닐게다.
거실 커튼을 활짝 열면 하루가 다르게 펼쳐지는 눈앞의 풍경들.
참으로 자연은 내게 소리없이 귀한것들을 무한대로 선물해 주곤한다.
파라피륜(?)이였던가.
어둠속에서 광풍이 미친듯 울어댈때
모진 비바람을 맞으며 밤새 부대낀 초목들의 지친 모습은
돌변한 아침 바람에 남은 잎새들만이 핼쓱하게 나풀거리고 있었다.
혼미한 생각들로 뒤범벅이 된 나는
풀한포기의 지혜로움에도 미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소름끼치는 순응을 보았다. 자연앞에서.
안개낀 초가을 새벽녁.
백로 한쌍이 길게 누운 앞산 허리을 휘감고
드러난 산봉우리를 향해 아스라히 멀어져가는 광경을 보며 졸시 한편을 끄적거린적도 있었고.
샛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잎의 황홀한 자태는 나를 아찔하게 만들었지.
감잎은 붉다 지쳐 주황빛으로, 밤잎은 갈색으로 치닫다 가을바람에 날려 마당에 수북히 쌓여가는 것들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인생의 사계를 곰곰히 되새겨 보았다.
봄볕에 움트는 새순처럼 유년의 봄은 아늑한 환희로 어우러진 오색빛 구름이였다.
그럼에도 여름의 화려한 응답은 간곳없이 조금씩 빗나가기 시작했다.
기대에 못미친 특출날것도 없었던 젊은날.
미적지근한 성격처럼 끈적거리게 달라붙던 방황과 긴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거렸지.
그게 내 젊음이였다.
소중한 젊음이여!
다시 돌아온다해도 아마 나는 그길을 되풀이해서 걸을지도 몰라.
아! 그러나 나도 돌변해 버렸다.
한사람의 아내가 되어 겉옷을 벗고, 자식을 키우면서, 그리고 한집안의 맏이 자리를 가늠해가면서 나만의 성을 어느결에 다 허물고 살아온 십수년.
헐벗은 나무가 되었구나.
때로는 쓸쓸함과, 암울함과, 허망함이 번갈아 가며 흔들고 가겠지. 겨울바람이.
그러나 오늘처럼 하얀옷을 입고 고귀한 모습으로 서 있는 날이 더 많으리라.
이제야 알것같다. 순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가족이 다닐 만큼의 길을 내며 마당에 쌓인 눈을 치웠다.
반백이 다 된 남편의 머리는 어느새 흰눈이 덮혀 올백이 되고
그뒤를 바짝 쫓고 있는 나는 등이 굽어 가는 사십 중반의 아줌마가 되어 이른 아침부터 길을 내고 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겨울나무 아래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