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일산에는 유선방송이 있다. 거기서는 놓친 드라마를 알뜰히 재방송 해준다. 요즘 내가 이 유선방송에 가끔 전화를 건다. “저, 바보같은 사랑 언제하나요?”라고. 그러면 가르쳐는 주면서도 ‘참 할 일 없는 아줌마 많아’하는 내색은 반드시 하고 만다. 그 수모도 견디면서 내가 즐겨보는 드라마가 KBS 2TV ‘바보같은 사랑’이다.
내가 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우선 배종옥을 보는 기쁨 때문이다. 우리 연예계 풍토에서 꽤 오랜 세월 묵히고 삭힌 좋은 배우를 만나기란 쉽지않다. 초창기 배종옥은 그저 귀엽고 깜찍하기만해 나는 ‘큰 물고기’는 아닐것이라고 섣불리 생각했다. 그 배종옥이 이제 세상의 온갖 일을 겪고, 눈썹떨림 하나로도 장편소설을 쓰니 그 자체가 감동이다.
두 번째는 작가 노희경 때문이다. 나는 노희경이 썼던 ‘거짓말’의 매니아였다. 숱한 훌륭한 책과 대단한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더 깊은 사랑의 정의를 배웠기 때문이다. 노희경의 대사는 누구처럼 톡 쏘지도 않고 코앞에 비수를 들이댄 듯한 짜릿함도 없지만 더없이 ‘인간적’이다.
세 번째는 연출자 표민수 때문이다. 그는 TV 영상을 제대로 아는 연출자이다. 바람둥이 재단사 상우와 미싱보조로 일하는 여주인공 옥희의 심리를 원근법으로 보여주는 솜씨는 퍽이나 훌륭하다. 또 인간의 슬픔을 웃음으로 꼬아내 한없이 시청자를 울리는 재주도 지녔다.
네 번째는 빛나는 조연들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얼마전 박원숙이 냉면국물을 맛있게 들이키는 연기는 압권이었다. 단 한 장면으로 박원숙은 성깔있고 인정많은 ‘미숙이 아줌마’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다섯 번째는 진짜 사랑이 나와서 본다. 그동안 우리 TV는 시청자의 비위만 맞췄다. 내 삶이 구질구질한데 드라마에서라도 화끈하고 멋있고 돈많은 ‘화려한 사랑’을 원하는 시청자의 수발만 들었다. 그 결과 희생과 기다림과 가슴떨림과 안타까움이 있는 ‘진짜 사랑’은 실종되었다. 없이 사는 사람들이 오골오골 모여 엮어내는 일상사―, 나는 그들을 절대로 ‘밑바닥 인생’이라고 부를 수 없다. 바람둥이 재단사 상우와, 어리버리하게 그러나 사랑 하나만은 착실히 다가가는 옥희를 ‘불륜관계’라고 부를 수 없다.
TV드라마가 망하려면 한두명만 수고하면 된다. 그러나 좋은 드라마가 나오려면 ‘모든 이’가 애써야 한다. 모두가 제몫을 한 ‘바보같은 사랑’을 보며 나는 바보같이 울곤 한다. 모든 것이 아름다우므로―.
조선일보 2000년5월22일자 발췌(방송인/전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