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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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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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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적에....


BY mujige.h 2000-10-25

내가 여덟살이 되도록 삼년간 살던 집은 바로 국민학교(초등학교)앞이었다

엄마가 집안일을 하시는 동안 우리 남매는 매일 학교 운동장을 놀이터 삼아

하루 해를 보냈다

육 이오 사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실은 엄청나게 부족 하여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등교 하는 때였다

그래서 운동장에서 야외 수업을 하는 학생들로 언제나 볼거리가 충분 했다

철봉과 시이소와 그네와 뺑돌이를 타면서 동생을 돌봐야 했던

조바심 나는 마음은 언제나 불안 했다

왜냐 하면 동생은 그야 말로 천방지축의 나이였으니까..

돌지나 몇개월쯤의 아기였으니 어른들 말씀따나 아기가 아기를 엎고 안고

거두는 격이였다

우리의 운동장 생활이 지속되자 지켜 보시는 선생님이 생겼고

급기야 막무가내인 우리남동생과 나를 하나!둘!...셋!넷!하고

구령을 외치며 행렬을 하는 학생들 앞줄에 세우시고 일학년 수업을 받게 하셨다

어린나이의 나였지만 부끄럽고 미안 해서 동생을 잡아끌고 가려고 해도

신이난 우리동생은 팔을 휘저으며 그저 선생님 하라는데로 따라하며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밑이 터진 면 바지를 입고 덜렁대는 밑천을 다 내놓고

그러다가 쉬이~를 하고 싶으면 아무데나 쉬이도 하고 응아~를 하고싶으면

아무데나 볼일을 봤으니...쏜살같이 집으로 뛰어가서 엄마를 데리고 오고

난 그때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어렸음에도...

그때는모두가 어렵던 시절이라 학교에서 우유를 끓여서 배급을 했는데

마음 좋으신 그선생님은 우리 남매까지 챙겨서 뜨거운 우유를 한컵씩 먹게 하셨다

물론 우유컵을 집에서 챙겨 갔고.. 그것도 나는 부끄러웠다

그렇게 풍금에 맞춰 노래를 배우고 무용도 하며 운동장에 있는 교단에 올라가

덩실대며 신명이난 남동생을 아래로 잡아끌며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아주 침착 하게 동생을 달래고 타일러서 또 다른 곳으로 끌고 가는곳..

얼마 안떨어진 중학교 운동장옆이다

거기에는 우리 아버지가 근무 하시던 학교였고 체육을 담당 하시던 아버지가

학생들을 데리고 운동장에서 수업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운동장 안에는 미군들의 막사가 크게 있었고 그곳도 언제나 볼거리가 많았다

금발에 피부가 하얗고 코가 높은 헬로모자(?)를 옆으로 비껴쓴 미군들이 많았으니...

조용히 구경만 했음 좋겠는데 동생은 거기서도 큰소리로 아버지를 외쳐대고...

학생들이 모두 쳐다보고 웃어대면 나는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마음인데

동생은 더 신이나서 싱글벙글이였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아버지...조금만 있다가 엄마에게 가거라...

그리고 미군부대안에 친구가 계셨는지 간혹 맛이 황홀한 비스켓을 얻어다 주셨다

그리고 구슬치기하는 꽃무늬가 들어있는 구슬도 얻어다 주시고

소꿉놀이 하는 장난감도 얻어다 주셨다

그당시에는 아주 희귀한 물건들이였다

그리고 아주 역한 냄새가 나던 깡통에 들어있는 노란 치즈..

파?方?곰팡이가 생기면 걷어내고 밥에 비벼서 엄마의 눈초리가 무서워서

억지로 먹었던 기억도 난다

우리집 아래에는 비닐 우산 만드는 공장이 있었는데

판자로 만든 담이 모두 부셔져서 작업장이 훤히 보였다

골목안에 아이들은 우산을 재단 하고 남은 빨간비닐 파란비닐 노란비닐 짜투리를 얻는게

대단한 횡재처럼 뿌듯 했다

눈에다 대고 해도 쳐다보고 하늘도 쳐다보고 땅도 보며 색색의 풍경을 만들었다

그학교앞에 몰려든 장사꾼들이 하교 하는 학생들의 발을 잡고

당연히 우리 남매의 호기심을 잡아두어 그야말로 눈호강을 하는 재미가

얼마나 좋았는지....

재일 신나는 아저씨는 칡뿌리를 톱으로 썰며 알칡뿌리!~를 외치던 사람..

그다음에 신나게 발을 굴러서 솜사탕을 뽑고 있는 사람..

또 달걀 아이스케키를 얼려서 팔던 사람...

그리고 구운 오징어를 롤러에 밀어서 편다음 가위로 잘라서 좌판에 진열 하던 사람..

재작년에 명동에 갔다가 뜻밖에 그 달걀 아이스케키를 만났다

너무 반가워서 하나를 사서 먹어봤는데 맛이 영 아니었다

아무튼 나의 유년기는 그리 지나고 드디어 일학년에 입학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우리 남매를 사랑해 주시던 바로 그 여자선생님이 담임이 되셨지 뭔가

그때부터 나의 고민은 다시 시작 되었다

나의동생은 내가 운동장에 있거나 교실에 있거나 누나를 찾아 다시 막무가내로 굴었으니까..

열심히 수업을 하고 있는데 문이 소리내여 열리고 빠끔히 얼굴을 들이밀며

히죽이 웃는 동생얼굴을 보는 순간에 나는 또다시 부끄러워졌고

선생님은 그런 동생을 내옆에 앉히시고 수업을 계속 하셨다

정말 지금은 있을수 없는 시절의 일이고 사랑이 많으시던 선생님 이셨다

결혼 후에도 혹간 만날수 잇는 기회가 있어서 인사도 드렸는데

지금은 어디에 계신지..... 뵙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