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는데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울먹울먹하는 게 목소리에 그대로 얹혀 있었다.
난 무슨 일이 있나 해서 잠시 멍-해졌다. 설이었다. 낮에 엄마아버지한테 들렀다 만나고 온 지 몇 시간도 안 되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왜?’하고 묻는 말에 동생은 되려 왜 그렇게 말랐냐고 물었다.
내가 생각해도 전화를 걸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화장실도 1시간 주기로 드나들고 있었고, 그 덕에 몸엔 거죽만 붙어있었으니까.
그래도 난 그런 말은 일절 비치지 않는다. 다만, ‘혈당이 안 잡혀서 그런 거겠지.’ 난 내 일을 남 말하듯 말했다.
동생은 걱정이 잔뜩 얹힌 목소리로 다시 큰 병원에 가보자는 말을 꺼냈다.
가보면 뭐 하니? 약을 먹어도 혈당이 떨어지지 않는데.
맥이 풀린 내가 동생의 말끝에 그리 대답했다. 동생은 그런 나를 당뇨는 혈당만 잘 관리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병이라고 달랬다. 나도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놈의 혈당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혈당을 잡으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을 해댔다. 한데도 혈당은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합병증을 덕지덕지 달고 살다 죽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서도 약을 끊었을까?
이야기를 주고받다 난 혈당 약을 끊은 지 꽤 된다는 말을 하고 말았다. 그 말에 동생은 기겁을 했다. 그게 꼬투리이기라도 한 듯 연가를 내고 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난 더는 막무가내로 밀어낼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의 의지가 한계에 다다라 있기도 했다.
난 일단 내 고집을 내려놓기로 했다. 대신 동생에게 덜 미안하고 싶었다. 그래 동생이 직장에 가지 않는 주말로 시간을 잡았다. 명절 끝에 연가를 낸다면 것도 눈치 볼 일이었다. 게다가 1년 넘게 약을 끊고 버텼는데 며칠 더 버틴다고 그 사이 큰 일이 벌어질 거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난 동생 손에 이끌려 병원으로 갔다. 속이 아프긴 했고 원하는 만큼 혈당이 내려가진 않았지만 그래도 약효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1년 넘게 약을 끊고 가서 잰 수치는 600 가까이 치솟아 있었다. 결국 인슐린 처방을 받아야 했다.
동생은 들어설 때는 미안해 허리를 굽신거리더니 나올 땐 또 고맙다고 굽신거렸다. 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서나오는데. 여전히 ‘난 당신의 도움이 조금 필요할 뿐 당신에게 완전히 기대지는 않아요.’라는 생각과 ‘당신이 내 명줄을 쥐고 있다고 생각지는 말아요. 내 명줄은 내 손에 있으니까.’라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바탕에는 내 오만도 있었겠지만 의사들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난 처음 만나는 의사들에게 내가 10여 년 동안 운동을 꾸준히 해왔다는 것과 내원 당시를 기준으로 최근 몇 개월간 운동을 심하게 하면서 땀을 엄청 흘렸다는 것, 그러고 나서 살이 듬뿍듬뿍 빠졌다는 것 등을 말했다.
그 말을 조금만 귀담아 들어줬더라면! 그리고 처방을 하기 전에 그걸 한 번이라도 생각했더라면! 들어주는데 5분도 걸리지 않을 말이었고, ‘그럴 수도 있어요.’는 30초도 걸리지 않을 말이었다. 내 딴엔 그 말이 내 상태를 진단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고 꺼낸 말이었는데. 단지 위로나 받으려고 꺼낸 말이 아니었는데.
그뿐이면 그래-도다. 의사를 보는 횟수가 늘어나면서는 혈당이 잡히지 않는 게 꼭 내 탓인 듯한 말들을 했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말투에서 풍기는 냄새가 그랬다. 내가 식이조절을 못하고 있는 걸 안 봐도 빤하다는 듯이.
내 말을 들어줄 여유도 없으니 내가 먹고 돌아서면 다음 끼니를 기다릴 정도로 먹는 걸 제한하고 있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첫날 보여준 의사의 태도가 내겐, 병원은 돈을 지불하고 약이나 받아오는 곳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내 속을 열고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맘이 생기겠는가? 당연히 ‘아니요.’다.
그때 의사들이 내 안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봤더라면! 그러면 내 소원이 몸무게를 늘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해볼 뿐 확신까지는 못하겠다. 그들은 내가 혈당관리를 못해서 살이 빠지고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머릿속에 당뇨와 관련하여 그 생각만이 들어있는 사람들처럼 내게 다가왔으니까.
지금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그때 내 몸 상태는 식이요법보다도 영양보충이 더 절실했었는데. 난 심한 영향결핍 상태의 극한에 다다라 있었는데. 내 오장육부가 힘이 없어 더는 일을 못하겠다고 두 손 두발을 모두 든 상태였는데.
내 바람과는 달리 의사들은 하나같이 내 이야기에 쓰잘머리 없는 하소연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걸 그들은 ‘그래서, 억울해요?’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 말이 내게는 꼭 ‘그딴 걸로 내 시간을 빼앗지 말아요.’처럼 들렸다.
얼마나 정나미가 뚝 떨어지던지! 난 그 말이 의사의 입에서 나오기 무섭게 입을 꾹 봉해버렸다.
그럼 환자의 기를 눌렀다고 의기양양해지는지 그들은 기계적인 의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자기들의 지시만을 읊어댔다. ‘밥의 양은 줄이고,’로 시작해서 당뇨병 환자에게 읊어 대서 입에 착 달라붙었을 말을 줄줄이 쏟아냈다.
혈당이 올라가면 눈치를 봐서 약의 개수를 늘렸다. 그러다 혈당이 떨어지지 않아 자신들의 확신이 꺾이면, 내 탓을 찾아내려 넌지시 쳐다보거나 고개를 갸우뚱할 뿐 그 이상은 없었다. 나 역시 첫날 이후 고개만 끄덕이고는 처방전을 받아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오는 게 버릇이 되어 있었다.
병원에 가는 게 내겐 그때까지 겪은 그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당뇨라는 병보다도 그게 더 나를 힘들게 했다. 그러니 의사도 약도 내겐 멀고 먼 당신일 뿐이었다.
내가 의사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약도 내 맘대로 양을 정하고 끊기도 하고. 그러면서 난 내 몸을 학대하고 있었다. 600에 근접하는 수치에 이를 정도로. 얼마나 내 몸이 그 상태로 버텨내고 있었을까? 꽤 오래였을 거 같다.
내 몸은 가뭄에 단비를 기다리는 땅처럼 인슐린을 애타게 기다렸나보다. 의사의 지시대로 난 인슐린 30단위를 맞았다. 그랬더니 바로 효과가 나타났다. 몸이 기름칠을 한 기계처럼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헬스자전거를 타는데 뻑뻑해서 조금만 타도 힘에 겹다고 신호를 보냈던 다리가 30분을 타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루 만에 내 얼굴은 달덩이처럼 둥그레졌다. 갑작스런 단비에 몸이 지나치게 반응을 하고 있었다. 허벅지도 수분이 들어가 탱탱해졌다. 며칠 만에 내 몸은 40Kg을 가볍게 넘겼다. 그러더니 쑥쑥쑥 몸무게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었다. 난 인슐린에 의지해 평생을 살 수 없었으니까. 내 몸에 주사바늘 꽂는 게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으니까.
다시 당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내 의지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상황을 봐가면서 양을 늘리라는 말과는 달리 난 줄일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운동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