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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할 때마다 영정사진 찍는 여자


BY 한이안 2013-08-31

난 죽음을 매달고 살고 있었다. 눈을 뜨면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늘 마음에서 죽음을 내려놓지 못한 채 살고 있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이른 나이였지만 죽음은 늘 그런 식으로 내 가까이에 있었다. 난 내 또래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살아내는 만큼 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건 내게 절망과는 다른 뭔가로 다가왔다. 살아있는 날을 아껴 써야 한다는 절망을 넘어선 희망? 그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건 난 죽음을 달고 살면서도 죽음보다는 삶을 더 생각했다. 내 엄마아버지가 저승에서 내려다봤다면 그런 날 두고 뭐라 하셨을까?

그래 그런지 자주 엄마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셨다. 난 엄마아버지께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다음세상으로 가시라고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난 돌아가신 엄마아버지에게 부담스런 딸이 되는 건 죽어도 싫었다. 형제에게도 부담이 되는 게 싫어 똥고집을 부리고 있는 내가 다음세상으로 가셔야 할 엄마아버지께 매달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형제에게 의지하는 게 백 번 나은 일이었다.  

그런 맘이 자리하고 있어서인지 난 단 한 번도 엄마아버지께 소원을 말해본 적이 없었다. 이승에서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넘치도록 하신 고생이었다. 저세상에 가서까지 이승의 자식들에 매이게 하실 수는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신 난 하늘에 대고 말한다. 소리를 쳐도 하늘에 대고 한다. 사실 난 하늘도 믿지 않는다. 철저히 나만을 믿고 의지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를 쓰고 해냈다. 운동도 꼬박꼬박 거르지 않고 했다. 하지만 몸은 내 의지와는 거꾸로 가고 있었다. 그러니 하늘에 맞서면서도 죽음을 떠올릴 수밖에. 그래도 내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난 가만히 누워서 끌려갈 수는 없었다. 두 다리에 힘이 없어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201111월 어느 날 난 외출준비를 마치고 거울을 들여다봤다. 빼짝 마른 얼굴을 단발머리가 감싸고 있었다. 눈은 퀭했다. 갑자기 영정사진이라도 찍어두자 하는 생각이 다가왔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명퇴를 한 후로 차려입고 나서는 것은 외출할 때뿐이었다. 모처럼 차려입고 그냥 지나치려니 아까웠다. 그래 영정사진이라도 찍어두자 했다. 죽으면 가장 먼저 마련해야 할 게 영정사진 아닌가 말이다.

난 디카를 가져와 벽을 배경으로 비스듬히 선 채 사진을 찍었다. 그 와중에도 좀 더 예쁘게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다가왔다. 그래 몸을 오른쪽 왼쪽으로 돌려가면서 여러 장을 꾹꾹 눌렀다. 그리곤 외출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사진을 카페에 올렸다. 나중에 내가 죽더라도 영정사진 때문에 형제들이 당황하지 않았으면 했다. 뿐만 아니라 사진이 없어서 어디 구석에서 찾아낸 후줄근한 사진을 걸어 놓을까봐 그것도 싫었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난 외출할 때마다 영정사진을 찍었고, 그것들 중에서 가장 잘 나온 것들을 골라 마무리로 다시 올렸다.  

지금도 내 카페에는 그때 올려둔 영정사진이 있다. 물론 카페지기인 나만 열어볼 수 있도록 해놔서 다른 사람들은 들여다볼 수 없지만 말이다.  

난 죽음이 내 가까이 다가와 있다고 한다면 굳이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외려 차근차근 준비를 해가면서 담담하게 맞이하고 싶었다. 속절없이 저승으로 끌려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악을 써대며 밀어낼 생각도 없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마저 누군가에게 떠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내게 있어서 삶이란 내 몫을 내가 책임지는 것이다. 그 누구의 짐이 되지 않는 게 내게 있어서의 삶이다. 이건 다른 사람이 아닌 내게만 허용되는 삶이다. 순전히 내 생각이 그러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