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은 내게 넌 딱 아버지야, 아니, 아버지보다도 더해, 라고 말한다. 난 그 말이 싫지 않다. 아버진 의지가 강하셨고 또 성실하셨다. 당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가족들, 특히 오빠를 힘들게 한 것이 흠이긴 하셨지만, 난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아버지를 대단한 남자였고, 훌륭한 가장이었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살림에도 가족을 온전하게 책임지셨으며, 형편이 안 되는 상황에도 나의 유학(遊學)과 대학입학을 반대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손으로 뒷바라지를 다 해내셨으니 아니라 할 수도 없다. 물론 국립사범대학이라 학비가 저렴하긴 했다. 그래도 아버지에겐 버거운 뒷바라지였을 게 틀림없다.
내가 교직에서 21년 하고도 6개월을 버틴 것은 순전히 아버지·엄마 때문이었다. 두 분이 겪어내실 심적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차마 퇴직이라는 것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아버지와 엄마를 보내드리고 3년째 되던 해 명퇴를 하고 교직을 떠나왔다. 우리 나이로 50도 채 안 된 49세 때였다. 준비를 해 놓은 것은 없었다. 다만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은 됐다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 안에 오롯이 남아있는 꿈이 전부였다. 그 꿈을 꺼낼 수 있을 거란 확신도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편했다. 교직을 떠나오는데, 오랫동안 입고 있던 거추장스런 옷을 훌훌 벗어던진 것처럼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떠나오기 전의 마음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남아도는 시간을 다 어떻게 감당하려고? 휴직을 했다가 복직하는 게 어때? 월급날 통장에 돈이 안 들어오면 허전하다는데? 남들 다 부러워하는 교직을 왜 그만두려하는데?······.
명예퇴직이라는 말에 형제들도 남들도 다 그렇게 한마디씩 건넸다. 홀가분하게 떠나기엔 이른 나이였다. 꿈이 없었다면, 교직에서 보람을 느꼈다면 나도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걱정의 목소리는 내 가슴까지 스며들지 못했다. 마냥 홀가분하기만 했다. 그건 교직을 떠나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세계가 된 교직을 떠올리는데 마치 나와 무관한 세계를 바라보는 듯한 마음이었다. 꼭 흙탕물에 휩쓸렸다 겨우 빠져나온 그런 기분이랄까?
2011년 3월 어느 날 난 차를 몰고 시내로 향했다. 명퇴를 하지 않았다면 수업을 하거나 업무를 처리하고 있거나, 밖에 잠시 나왔다면 들어갈 생각으로 분주할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난 차를 몰고 여유 있게 달리고 있었다. 갑자기 봄날의 거리에 넘실거리는 햇살이 축복의 꽃가루처럼 여겨졌다. 꼭 천상의 도로를 달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월급이 들어와야 할 때 들어오지 않으면 허하다는 걱정도 나와는 별개였다. 내 마음으로 느끼는 내 주머니는 두둑했고, 그걸 물려줘야 할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내겐 부족한 게 없었다. 내 꿈을 이루어내는 것만이 유일하게 내게 남아있는 숙제였다.
그해 3월 난 책상에 앉았다. 엄마와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두 분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마지막에 보여주셨던 두 분의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오롯이 다가왔다. 다른 건 모두 지워지고 없었다. 처음으로 엄마와 아버지가 온전하게 보였다. 엮여 살 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었고, 느껴 보지 못했던 마음이었다. 그 모습을 생각하자니 글 속에서라도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했다.
언니의 집에서 시골 아버지의 집, 엄마와 아버지가 일구고 살아낸 집으로 돌아오는 곳에서 글을 열었다. 그렇게 내 퇴직 후 첫 장편 ‘연’이 시작됐고 두어 달 걸려서 초고를 완성해 냈다. 그걸로 난 걱정 한 고비를 넘겼다. 원고지가 아닌 책장으로 500여 페이지 되는 작품을 써냈다는 게 날 뿌듯하게 했다.
그렇게 내 새로운 삶은 시작되었다. 난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다. 난 나이 50을 앞두고 비로소 내 엄마와 아버지의 제대로 된 딸로 태어났다. 그리고 내가 되었다. 그래서 난 50에 태어난 여자다. 일찍 제 꿈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턱없이 뒤늦은 나이였지만 그래도 난 속상하지 않다. 다만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 난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신 내 아버지에게, 내 어머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가끔 한 번씩 뱉어내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