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올 거 같지 않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 내 텃밭의 작물들이 살았다 하며 기지개를 맘껏 켜겠지.
주춤하는 폭염에 대고 올해는 니 운명도 다해가네 하고 고소해한다.
오후가 되니까 비가 주춤하다. 난 점심을 챙겨먹고 밭으로 간다. 그러고 보니 난 비만 오면 밭으로 달려가는 거 같다. 땅이 촉촉할 때 심으면 내 작물들이 좋아하겠지. 비가 오니 구슬땀을 흘리지 않아도 되겠지. 뭐 그런 생각이 앞서다보니 그게 버릇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비만 오면 날궂이 하는 여자가 됐다.
작년에 텃밭을 사고 첫 작물을 심을 때도 그랬다. 비가 오는데 마침 논산 장날이었다. 무작정 차를 몰아 시장으로 갔다. 고구마 순 1단과 땅콩 모종 50포기, 가지, 참외 등등 모종을 사서 그냥 밭으로 내달렸다. 모처럼 오는 비인데 맞으면 어떠랴 싶었다. 나한테는 고맙기 그지없는 비였다.
비를 맞으며 쇠스랑과 삽으로 땅을 파 이랑을 만들고 사온 것들을 심었다. 옷은 모두 비에 젖었고, 한기도 들었다. 그래도 비가 오는데 그게 문제랴! 바작바작 타들어가던 가뭄 끝에 내려주는 비인데.
그런 날 두고 처음 보는 이웃들이 날궂이한다고 한 마디씩 하고 지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처럼 내리는 비가 내겐 꿀맛 같은 단비였다. 그렇게 내 첫 농사꾼 생활이 시작되었다. 2012년 6월 8일. 그리고 1년이 훌쩍 지나가 내 텃밭에선 두 번째 작물들이 쑥쑥 자라가고 있다.
이제 이웃들의 입에서 그런 말은 쏙 들어갔다. 내가 비오는 날 밭에서 일을 하더라도 더는 낯설게 보는 사람도 없다. 대신 젊은 사람이 알뜰하게 가꾼다며 지나가다 머물러 이야기도 주고받다 가신다. 이웃들도 생겨 이것저것 남는 모종을 챙겨주시기도 한다. 들깨모도 대파 모도 모두 이웃들이 줘서 심었다. 1년의 시간이 준 열매들이다.
무는 씨앗을 뿌렸으니 배추만 모종을 사다 심으면 된다. 날씨가 덥다보니 무가 3일 만에 뾰족뾰족 올라오고 있다. 지하수를 통에 받아 차에 실고 가 뿌려준 공을 그리 갚는다.
도랑에 난 풀을 얼른 뽑아내고 육묘장에 가서 배추 한 판을 사온다. 공짜로 가져가라는 걸 기어이 돈을 주고 온다. 육묘장 사모님이, ‘이웃인데.. 그냥 줘야 하는데..’ 하신다. 하지만 사업하는 사람이 애써 가꿔놓은 것을 거저 가져오는 것은 내 맘이 허락지 않는다. 봄에도 오이며 가지, 등등의 모종을 사오는데 시장보다 훨 싸게 준데다 덤으로 방울토마토까지 챙겨줘 제법 따 먹었는데, 그것도 고맙기 그지없는데, 팔려고 애써 가꿔놓은 것을 또 거저 가져오면 안 될 일이다. 난 가까이 육묘장이 있어서, 시장보다 싸게 살 수 있어서 그것도 고맙기 그지없다. 그것만도 어딘데.
난 비가 주춤한 틈을 타 모종을 심고 쪽파도 심는다. 비는 얌전히 내리고 있다. 하늘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올 농사는 김장거리를 심은 걸로 거의 마무리가 돼간다. 이제 잘 가꿔 결실만 잘 하면 될 일이다. 아직까진 무리가 없어 보인다. 폭염에 도로 옆 모래땅에 심어진 땅콩은 절반 가까이 타 죽었음에도 내 밭의 땅콩은 모두 쌩쌩하게 잘 자라주고 있으니 그것도 감사할 일이다.
살다보면 세상엔 감사할 일도 많다. 오늘처럼 내려주는 비도 그중 하나다. 그러고 보니 난 딱 농사꾼이다. 아버지·엄마가 이런 날 내려다보고 계신다면 뭐라 할까? 생각을 해보고 난 그냥 웃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