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치도 않은 할미의 후회
육중한 병원 문을 무겁게 밀고 들어서니 여기저기에 보자기를 머리에 쓴 여인네들이 보인다. 암환자다. 좀 더 깊숙이 들어서면 구석마다 모여서서 눈물을 찍어내는 모습도 보인다. 암환자의 식구들이다. 대부분은 처음으로 암이라는 진단을 받아 든 경우다. 5년차의 내 눈엔 새삼스럽거나 서글픈 일은 아니다. 늘 봐 왔던 광경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오죽하랴 하는 안쓰러움은 아직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주치의를 만나려고 접수를 하고 지정된 방 앞에 앉아 한숨을 돌린다. 진료 예약은 2시 20분. 오늘은 좀 이른 출발을 해서 시간이 여유롭다. 어제는 영감이 손수 기사노릇을 해줘서 아주 편하게 검진을 끝냈다. 그런데 차체가 덜컹거릴 때마다 아직 시원찮은 내 갈빗대가 신음을 해서 여간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아예 지하철을 이용했기 때문에 대문을 나선지 장장 3시간 만에나 의사와 마주앉겠구먼.
“잘 지내셨어요.”
머리도 돌리지 않은 채 컴만 들여다보며 툭 던지는 말이다.
“….”
대답이 없자 회전의자를 돌려 얼굴을 보이며,
“이상 없습니다.”한다.
혹시 나빠지지나 않았나 하는 6개월의 조바심. 그리고 어제의 진료와 오늘의 수고에 대한 대답으로는 너무 무성의한 대답이다. 뭐가 어떻게 이상이 없는지 좀 더 상세하게 말해줬으면 싶다. 이제는 중증환자를 벗어나서 엄청난 검진료도 지불하지 않았는가 말이지. 그렇다고 주치의를 붙들고 앙탈을 늘어놓을 만한 강심장도 아니고, 나는 그럴만한 통뼈를 가진 주재도 되지 못한다.
“안 좋은데요.”하는 말을 기대한 건 아니잖느냐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바닥 난 약을 주문하고 물러날 수밖에.
늘 그래왔던 터라 오늘도 다음 진료 일을 조용히 예약하고 ‘의무기록사본 증명서’를 요구한다. 거금 2000원과 30분을 투자하고는, 어제 검진한 결과를 고스란히 손에 넣는다. 그리고는 집으로 가서 지난번의 결과지와 비교해서, 달라진 수치를 보는 것으로 조금의 궁금증을 덜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급해서 집에 도착하기까지 덮어 두기가 어렵다. 차 속에서 우선 제일 뒷 페이지에 있는, 문제의 ‘CEA’수치를 살펴본다. 수술 뒤의 추적으로는 큰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참고치가 0~4인데 요번에는 5.6으로 나왔다. 지난번엔 5.9의 수치에도 이상이 없다고 했겠다?! 옳거니! 언젠가는 6.9까지 치솟았어도 괜찮다고 했지. 음~ 기분이 제법 괜찮구먼.
한결 가벼워진 마음 때문일까. 돌아오는 길은 그리 멀지 않은 듯. 집에 돌아와 급히 지난번의 ‘의무기록지’를 꺼내 나란히 펼쳐놓는다. ‘검사방법’이나 ‘사용한 의료기구명’ 등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그저 전과 달라진 수치에만 신경이 간다. 사실 처음엔, 부족한 상식으로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인터넷을 뒤지며 훑었다. ‘Seg.neut.’가 점점 줄어들었으니 좋은 현상은 아니로고. 와중에 ‘Lymphocyte’가 참고치의 상한가인 44를 훨씬 넘어 승승장구하더니 37.1로 주저앉았으니 그건 참 다행이구먼. 채혈의 결과로 ‘AST(GOT)’와 ‘ALT(GPT)’가 걱정스럽게 높다고 겁을 주고는 혹시 진통제를 먹었느냐고 다독이더니, 것도 각각 25와 15로 참고치 안으로 여유롭게 내려앉았으니 것도 다행.
아이고~. 아무리 아는 척을 해봐야….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처음에는, 과욕한 먹거리는 버리고 모자라는 영양소는 찾아 헤매며 부산을 떨었지, 그러나 이젠 그도 힘들다. ‘긴 병에 효자 없다’더니 긴병엔 열성도 없어지나 보다. 이젠 ‘검체검사담당의’의, ‘… 등의 이상소견이 관찰되지 않음’만 눈에 띄면 안심이다. ‘시사할 만한 소견은 없음’하는 문구도 과히 반갑다. 늘 생각하는 일이지만, 전문용어를 풀어서 나 같은 무뇌한(無腦限)도 좀 보기 쉽게 해 줄 법도 한데 말이지. 아니면 좀 더 친절한 설며을 좀 해 주던지.
보림아~.
할미가 전공을 잘 못 택한 거 같여~. 시방 같아서는, ‘의예과(醫豫科)’가 좋지 않았을까 싶구먼. 아니, 이 할미가 의예과를 갈만한 실력은 됐을까나? 케케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