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님과 딸년
“나는 며느리랑 내 딸을 구별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자, 아들이 콧방귀를 꼈다. 제 댁이 해산을 하고 조리원에서 귀가한 그날, 제 여동생을 제쳐놓고 저녁을 시켜먹더란다.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이다. 5년 전의 일이었으니까. 아주 많이 섭섭했다고. 아들의 말이지만 며느님의 마음이 실려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뒤로 긴 날을 두고 생각에 잠겼다. 내 성격으로 아들내외가 많이 섭섭하더란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잃어버릴 일이 아니다. 긴 소설을 쓰는 밤이 많았다. 결과, 내린 결론은 <세대차이>다. 그들이 사는 ‘이 시대’와 내가 살던 ‘그 시대’가 너무도 많이 다르다는 데에 생각이 머룰렀다. ‘나는 해산날도 일어나 일했는데….’ 시방,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구먼.
세 번째 아이까지 유산이 되자 다시 임신하기를 포기하고 양장점을 차렸다. 양장점이 호황이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에 네 번째 임신을 했다. ‘내 팔자엔 아이가 없지.’라고 자가 진단을 하고 마음을 편히 가져서 였을까. 매일 밤을 새며 작업을 했으나 아이는 잘 견뎌주었고 딸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 마흔 살을 훌쩍 넘겼으니 사 십하고도 오년쯤 전의 일이다.
주문받은 일거리는 수북하게 쌓였는데, 열네 명이나 되는 종업원을 놀려야 할 판이다. 그날로 퇴원을 해서 집으로 왔다. 방바닥에 원단을 펴고 쭈그리고 앉아 재단을 했다. 우선 네 벌을 재단하고 드러누웠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시 세 벌을 잘랐다. 젊은 혈기였겠다. 말리는 사람도 없었고 말릴 상황도 아니었다. 욕심껏 주문을 받아놓은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지.
누워서 사람을 부린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들이 내 맘같이 움직여주지 않음은 당연했다. 종업원은 역시 종업원일 뿐이다. 참다가 사흘 만에 일어났다. 가게에 나가서 종업원들의 동태만 살펴도 일은 일사천리다. 나이 많은 아줌마 종업원이 극구 말렸으나 들을 내가 아니다. 재단 상에서 재단도 하고 손님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욕심이 지나쳤던 것 같기도 하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던 시절. 나는 사 남매를 두었다. 아이를 낳을 때마다 그 지경이었으니 산후 조리로 내 몸을 관리하는 일보다 일이 먼저였다. 아니지. 일이 아니라 ‘돈’이 더 필요했다는 것이 좀 더 솔직한 고백이겠다. 사 남매를 기르는 일이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는 말이겠다.
오늘, 티비 앞에 딸아이와 마주앉아 ‘출산’에 대한 이야기를 시청하고 있었다.
“해산 한 달이 되도 산모의 물러난 뼈가 제 자리에 안 돌아온 대요.”
“네 올케가 해산하던 날, 너도 집에 있었는데 내가 올케한테 저녁을 하라고 했다는구나.”
“정말?! 엄마가 정말 그러셨다면 정말 섭섭했겠네요.”
“조리원에서 보름씩이나 호강하고 왔으니 아마 밥을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보림아~. 네가 동생을 보게 되면, 할미가 많이 배우고 어미한테 잘 할 거라구 야그 혀. 그때 섭섭했던 거 싸~악 씻게 해 준다고 혀라~ 그라고, 나이 많은 네 고모는 어린아이만 같고, 고모보다 나이 적은 네 엄마가 더 어른 같으니 어쩌냐. 나이 먹고 병이 드니, 할미가 니 어미한테 자꾸만 기대고 싶어. 네가 엄마 말을 알아들을 쯤에는 에미처럼 할미가 밉겄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