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의 이별2
오늘 나는 딸 하나를 잃었다. 나이 40. 딸을 둘 둔 내 큰딸아이가 인천공항을 뒤로 하고 멀리 미국으로 떠났다. 출국 날짜가 다가올수록 정말 떠나는가 싶더니 오늘 정말 떠났다. 남편이 좋은 조건으로 승진을 하고 떠나는 일이니 서러워할 일만은 아니지만, 어미 마음이 딸을 영영 잃었는가 싶게 저리다.
큰 외손녀딸이 먼저 유학을 가고 그도 어미라 딸을 떼어놓고 노침초사(勞心焦思)하더니, 뜻을 이루어 미국으로 가게 됐다. 이제 고2인 작은 외손녀딸에게도 좋은 기회라며, 내 딸년은 신이 나서 뛰어다니더라만…. 딸년을 떠나보내는 이 어미의 마음을 좀 헤아려 줬으면 좋으련만. 어미 맘을 챙기지 못하는가 싶으니 그도 가슴이 아프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서 미처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나에게 ‘장모’라는 모자를 씌워 준 그녀. 것도 모자라서 아직은 젊은 나이에 ‘할미’라는 이름을 씌워 준 그녀. 왜 나는 그 딸년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는지. 미처 어미 노릇을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어린 나이의 시집살이며 어미노릇이 어려웠으리라는 짐작으로 나를 서럽게 한다.
이 어미보다도 더 많이 현명한 그녀라 내 걱정이 기호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나는 진즉부터 잘 알고는 있다. 특히 어미로서의 그녀의 용기에, 오히려 내가 부끄러울 때가 많다. 그의 삶이 오로지 두 딸년을 위한 희생과 과감한 투자와 눈물겨운 배려였기에, 때로는 태클을 걸어보지만 ‘쇠귀에 경 읽기’다.
“엄마를 닮아서, 아빠를 닮아서….”라고 하지만 글쎄. 언제 나도 그러했던가. 그러나 어쩌겠는가. 제 새끼를 위한 길이라는 데에야. 우선은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아마도 더 큰 꿈을 가졌음에 틀림이 없다. 곧 이 어미를 놀래게 할 소식이 올 것만 같은 예감이 있다. 두 손녀딸들이 제법 공부를 잘하니, 아마 현지의 동기들을 제패했다는 소식이 오려나?
이젠 내 집 냉동고에 누가 고기를 채워줄꼬. 그 아이는 손이 커서 고기를 들고 와도 한두 근으론 족하질 않는다. 쇠꼬리면 두어 벌. 갈비면 두어 짝. 살코기는 여 나무 근. 영양제도 그 아이가 도맡아 대령했으나 그 호사도 이젠 그만이겠지. 오픈 ‧ 카에 어미를 실어 호강시키더니 그도 저도 이젠 끝이로구먼.
뭐니 뭐니 해도 병원에 다니는 일이 문제다. 정기검진을 다닐 때면 나는 전날 저녁부터 금식을 해야 한다. 굶은 몸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어려워서, 지치기 전에 부지런을 떨어서 하루 전에 딸네로 이동을 했고 다음 날 병원으로 태워갔는데…. 태워 가고 태워 오는 게 제 몫인 양 설치더니, 당장 다음 달이 걱정이다. 영감이 짬을 내려나?
마음에 자꾸만 다시는 볼 수가 없을 것 같은 그녀와 그 식솔들이다. 몸이 약하니 마음도 약해서일까. 위독하다 해도 올 채를 말라고 일러서 보냈다. 미국이 어딘가. 그도 북 버지니어라니 소식을 듣고 급히 떠나와도 아마 나는 기다리지 못할 것이다. 볼 수도 없을 때 오면 뭘 해. 고생이나 하지. 차라리 볼 수 있을 때에 다녀가는 게 나은 게야.
막내아들을 일본에 보낼 때는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로 다시 보지는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시 몸이 아파서 누워도 세 시간이면 날아올 테니까. 이제는 원전 사고의 후미 소식도 들어 볼 수도 없고, 사지(死地)에 아이들을 맡겼는가 싶어서 심란하던 터라 내 마음이 요동을 친다. 내 걱정에 달라질 상황은 아무 것도 없다지만 어미 마음이 그런가. 어서 잘 도착했다는 소식이라도 들었음 좋겠다. 얘들아~. 엄마를 잊지 마란 말이야.